안희연 「설경」
다 망가져버렸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어 눈이나 펑펑 와버렸으면 지나고 보니 모든 게 엉망이어서 개들이라도 천방지축 환하게 뛰어다닐 수 있게 새하얀 눈밭이었으면, 했지 그래서 그리기 시작했다네, 눈에 파묻힌 집 눈만 마주쳐도 웃음을 터뜨리던 두 사람이 이제 더 이상 살지 않는 집 깨진 계란껍질 같던 마음도 같이 파묻었지 캔버스 앞으로 모여드는 사람이 많았다 아무도 밟지 않은 흰 눈에는 그런 힘이 있으니까 곰은 곰의 발자국을 찍고 가고 바람은 바람의 발자국을 찍고 가고 모두들 자기 발자국을 들여다보기에 바빴다 그 집은 악몽으로 가득 차 있다고 소리쳐도 아무도 믿지 않았다 지붕까지 파묻힌 집이 어떻게 공포스럽지 않은 거야? 내게는 모든 게 엉망이었던 시간인데 사랑과 낮잠은 참 닮은 구석이..
2021.03.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