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희연 「설경」

2021. 3. 21. 12:46同僚愛/안희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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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망가져버렸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어

눈이나 펑펑 와버렸으면

지나고 보니 모든 게 엉망이어서

개들이라도 천방지축 환하게 뛰어다닐 수 있게

새하얀 눈밭이었으면, 했지

그래서 그리기 시작했다네, 눈에 파묻힌 집

눈만 마주쳐도 웃음을 터뜨리던 두 사람이

이제 더 이상 살지 않는 집

깨진 계란껍질 같던

마음도 같이 파묻었지

캔버스 앞으로 모여드는 사람이 많았다

아무도 밟지 않은 흰 눈에는 그런 힘이 있으니까

곰은 곰의 발자국을 찍고 가고

바람은 바람의 발자국을 찍고 가고

모두들 자기 발자국을 들여다보기에 바빴다

그 집은 악몽으로 가득 차 있다고 소리쳐도

아무도 믿지 않았다

지붕까지 파묻힌 집이 어떻게 공포스럽지 않은 거야?

내게는 모든 게 엉망이었던 시간인데

사랑과 낮잠은 참 닮은 구석이 많다고

한여름 밤의 꿈이었다고 생각하면

조금 연한 기분이 되기도 한다고

속삭이는 소리가 들렸다

인간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눈은 언젠가 녹는 것

반드시 녹는 것

시간이 긴 팔을 뻗어 울타리를 만드는 것이 보였다

모든 것이 제자리에 있었다

 

 

 

from Maragda Farràs

 

 

 


 

 

 

김현 외, 첫사랑과 O, 알마,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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