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희연 「설경」
2021. 3. 21. 12:46ㆍ同僚愛/안희연
728x90
다 망가져버렸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어
눈이나 펑펑 와버렸으면
지나고 보니 모든 게 엉망이어서
개들이라도 천방지축 환하게 뛰어다닐 수 있게
새하얀 눈밭이었으면, 했지
그래서 그리기 시작했다네, 눈에 파묻힌 집
눈만 마주쳐도 웃음을 터뜨리던 두 사람이
이제 더 이상 살지 않는 집
깨진 계란껍질 같던
마음도 같이 파묻었지
캔버스 앞으로 모여드는 사람이 많았다
아무도 밟지 않은 흰 눈에는 그런 힘이 있으니까
곰은 곰의 발자국을 찍고 가고
바람은 바람의 발자국을 찍고 가고
모두들 자기 발자국을 들여다보기에 바빴다
그 집은 악몽으로 가득 차 있다고 소리쳐도
아무도 믿지 않았다
지붕까지 파묻힌 집이 어떻게 공포스럽지 않은 거야?
내게는 모든 게 엉망이었던 시간인데
사랑과 낮잠은 참 닮은 구석이 많다고
한여름 밤의 꿈이었다고 생각하면
조금 연한 기분이 되기도 한다고
속삭이는 소리가 들렸다
인간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눈은 언젠가 녹는 것
반드시 녹는 것
시간이 긴 팔을 뻗어 울타리를 만드는 것이 보였다
모든 것이 제자리에 있었다
김현 외, 첫사랑과 O, 알마, 2019
'同僚愛 > 안희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안희연 「소동」 (1) | 2021.06.29 |
---|---|
안희연 / 내가 달의 아이였을 때 (1) | 2020.09.02 |
안희연 / 업힌 (1) | 2020.09.01 |
안희연 / 12월 (1) | 2020.07.05 |
안희연 / 시간의 손바닥 위에서 (1) | 2020.07.0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