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원(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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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혜미 / 근린
이혜미 / 근린 곧 만나 어둑한 공원 냄새가 났다 서성이다 희미해지는 마음 너무 가까워 닿지 못하는 공원의 발자국들 다정한 이웃들은 일요일 속에 있고 희박해지는 인사들은 어긋난 체온을 지니는데 우리는 무엇을 가졌나 무엇에 녹아내렸나 그건 왼쪽을 찢고 나온 말 곧 만나 곧 만나 나무가 색색의 손인사들을 맞추어 낯익은 단어를 완성하는 공원에서 약속을 생각하면 입술이 녹아내린다 평생 모아둔 라일락을 탕진한 늦봄처럼 이혜미 / 근린 (이혜미, 뜻밖의 바닐라, 문학과지성사, 2016) https://www.instagram.com/donkgrine/
2020.11.28 -
김중일 / 최선을 다해 하루 한번 율동공원 돌기
김중일 / 최선을 다해 하루 한번 율동공원 돌기 아버지 공원이라도 좀 도세요. 어머니도 이제 건강을 생각하세요. 나는 최선을 다하고 있다. 네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네 어머니를 신경 써라, 우울증이다. 어머니는 아무 말 없이 설거지를 했고 아버지는 최선을 다해 부엌으로 걸어가 어머니의 이마에 입맞춤했다. 천천히, 천천히, 천천히 그리고 오래도록. 보석함 속의 청혼 반지. 아버지는 푸른 옥빛 상자를 열듯 주름 사이로 손가락을 넣어 어머니 이마를 열고 누런 금반지를 꺼내 내게 건넸다. 봐라, 나는 최선을 다하고 있다. 건강을 위해, 네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이 지구에서, 나는 최선을 다하고 있다. 오늘도 지구라는 고장난 낙하산이 우주의 길바닥에 터진 풍선처럼 떨어져 있다...
2020.08.24 -
황인찬 / "내가 사랑한다고 말하면 다들 미안하다고 하더라"
황인찬 / "내가 사랑한다고 말하면 다들 미안하다고 하더라" 공원에 떨어져 있던 사랑의 시체를 나뭇가지로 밀었는데 너무 가벼웠다 어쩌자고 사랑은 여기서 죽나 땅에 묻을 수는 없다 개나 고양이가 파헤쳐버릴 테니까 그냥 날아가면 좋을 텐데,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그날 꿈에는 내가 두고 온 죽은 사랑이 우리 집 앞에 찾아왔다 죽은 사랑은 집 앞을 서성이다 떠나갔다 사랑해, 그런 말을 들으면 책임을 내게 미루는 것 같고 사랑하라, 그런 말은 그저 무책임한데 이런 시에선 시체가 간데온데없이 사라져야 하는 법이다 그러나 다음 날 공원에 다시 가보면 사랑의 시체가 두 눈을 뜨고 움직이고 있다 황인찬 / "내가 사랑한다고 말하면 다들 미안하다고 하더라" (황인찬, 사랑을 위한 ..
2020.02.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