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윤수 「폭설」
높은 궁지에서 분분히 하강하는 피난 눈이 내린다 오랜 나날 동안 그 앞을 지나다녔으나 한 번도 본 적 없는 어떤 골목의 입구 시든 꽃나무 흙덩이를 안은 채 깨어진 화분들과 창백하게 뒹구는 연탄재 위에도 눈이 쌓인다 여기는 어디선가 본 멸망의 나라 사람들 모두 눈보라 속으로 사라져가고 건너편 횟집 수족관 속의 물고기들만 화석처럼 뻐끔뻐끔 이곳을 바라본다 두껍게 얼어붙는 시간의 계곡이 전 생애의 날개를 저어 떠나버린 것들의 뒷모습을 닮았다 하얀 침묵이 소리 없이 지상의 발목까지 내려 쌓이는 동안 그 골목으로 아무도 출입하지 않았다 폭설이 서서히 골목의 입구를 닫고 있었다 사윤수, 그리고, 라는 저녁 무렵, 시인동네, 2019
2021.01.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