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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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민하 「가위」
어떤 날에 우리는 철없이 병이 깊었다 일요일인데 얘들아, 어디 가니? 머리에 불이 나요 불볕이 튀는데 없는 약국을 헤매고 창가에는 화분이 늘었다 좋은 기억을 기르자꾸나 머리카락이 쑥쑥 자라고 눈 코 입이 만개할 때마다 오늘은 특별한 날이니까 생크림을 발라줄게 촛불을 끄렴 나쁜 기억의 수만큼 전쟁을 줄입시다 담배를 줄이듯 징집되는 소녀들은 머리에 가득 초를 꽂고 꿈자리에 숨어도 매일 끌려가는데 우리의 무기는 핸드메이드 페이퍼에 혼잣말을 말아 피우는 저녁 사는 게 장난 아닌데 끊을 수 있나 몸값 대신 오르는 건 혈압뿐이구나 위층의 아이들은 어둠을 모르고 군악대처럼 삑삑거리는 리코더 소리 이놈의 쥐새끼들 같으니! 막대기로 두드려봤자 천장이 문도 아닌데 입구가 없으면 출구도 없을 텐..
2021.06.06 -
라이너 쿤체(Reiner Kunze) / 두 사람
라이너 쿤체(Reiner Kunze) / 두 사람 두 사람이 노를 젓는다. 한 척의 배를. 한 사람은 별을 알고 한 사람은 폭풍을 안다 한 사람은 별을 통과해 배를 안내하고 한 사람은 폭풍을 통과해 배를 안내한다. 마침내 끝에 이르렀을 때 기억 속 바다는 언제나 파란색이리라. 라이너 쿤체(Reiner Kunze) / 두 사람 (류시화, 시로 납치하다, 더숲, 2018) https://www.instagram.com/donkgrine/
2020.07.02 -
안희연 / 파트너
안희연 / 파트너 너의 머리를 잠시 빌리기로 하자 개에게는 개의 머리가 필요하고 물고기에게는 물고기의 머리가 필요하듯이 두개의 목소리가 동시에 터져나오더라도 놀라지 않기로 하자 정면을 보는 것과 정면으로 보는 것 거울은 파편으로 대항한다 잠에서 깨어나면 어김없이 멀리 와 있어서 나는 종종 나무토막을 곁에 두지만 우리가 필체와 그림자를 공유한다면 절반의 기억을 되찾을 수 있겠지 몸을 벗듯이 색색의 모래들이 흘러내리는 벽 그렇게 너의 슬픔이 끼어들 때 나의 두 손으로 너의 얼굴을 가려보기도 하는 왼쪽으로 세번째 사람과 오른쪽으로 세번째 사람 손몬과 우산을 합쳐 하나의 이름을 완성한다 나란히 빗속을 걸어간다 최대한의 열매로 최소한의 벼랑을 떠날 때까지 안희연 / 파트너 (안희연, ..
2020.05.30 -
서대경 / 흡혈귀
서대경 / 흡혈귀 흑백의 나무가 얼어붙은 길 사이로 펄럭인다 박쥐 같은 기억이 허공을 난다 모조리 다 헤맨 기억이 박쥐로 태어났다 나는 인간의 피를 먹지 않는다 내가 두 손가락을 입에 대고 휘파람을 불면 박쥐가 내 어깨에 내려앉기 까지 한다 서대경 / 흡혈귀 (서대경, 백치는 대기를 느낀다, 문학동네, 2012) https://www.instagram.com/donkgrine/
2020.05.27 -
유희경 / 숲
유희경 / 숲 그 자리에서 그 남자가 적고 있는 것이 어떻게 그리 파랗기만 한 것인지 먼지 같은 기억 떠올라 좀체 가라앉지 않습니다 그는 왼손으로 방향이 없는 이마를 감싸고 계절과 계절을 견디고 있어요 아무런 일도 생기지 않을 테지만 그보다 불안한 각도를 본 적이 없어 시름에 덮여가는 중입니다 그렇게 불안은 태어나고 숲처럼 가만가만 상처를 핥는 것입니다 유희경 / 숲 (유희경, 당신의 자리 - 나무로 자라는 방법, 아침달, 2017) https://www.instagram.com/donkgrine/
2020.03.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