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하늘(6)
-
김하늘 『샴토마토』
대학 시절 도서관에서, (내가 유일하게 토마토를 먹지 못해서) 유독 눈에 띄었던 시집 『샴토마토』. 당시 잘 알지 못했던 파란 시선과 한 번도 들어본 적 없던 시인 '김하늘'. 성별을 알 수 없는 기묘한 문장들 속에서 어찌 된 영문인지 퇴폐미가 과즙처럼 뚝뚝 묻어나길래, 나는 그 자리에서 몇 시간 동안 읽었었다. 이후 곧장 모바일로 주문까지. 이건 꼭 내 서재에 꽂혀 있어야만 해 하며. 내가 진정 쓰려고 했던 건 이런 게 아니었을까. 언젠가 퇴폐적이라는 말을 참 사랑했는데.이따금 『샴토마토』를 읽으면 나는 여전히 그런 생각에 잠기곤 한다. 우연이라고 하기엔 그날은 내게 너무 강렬히 배어 있다. 이제는 인스타그램으로 안부도 건넬 수 있는 사이. 뭐랄까 나를 대변해 주는 듯한 기분 좋은 착각과 이야기 속에..
2021.01.10 -
김하늘 / 여분의 고백
김하늘 / 여분의 고백 나를 깨닫던 어떤 하루는 나태하게 외로워할 시간이 있고, 살 수 없을 것 같은 기다림이 있고, 과식할 꿈이 있어서, 그토록 자유롭지 못했어 그건 아마 버림받은 영혼의 유언 볼에 Bisou를 받지 못한 아침은 축복을 빌어 줄 이가 없고, 끝없이 흔들릴 마음이 있고, 그러나 기도하는 손이 부끄럽지 않기에 사랑해, 라는 말이 입버릇이 되어 네게 다정한 사람이 되고 싶었어 정말이야 김하늘 / 여분의 고백 (편집부, 계간 파란 겨울호, 파란, 2019) https://www.instagram.com/donkgrine/
2020.11.11 -
김하늘 / 너는 없고 네 분위기만 남았어
김하늘 / 너는 없고 네 분위기만 남았어 너는 없고 네 분위기만 남았어 둘이었던 골방에선 늘 오래된 알약 냄새가 나 2인용 빨간 소파에 달라붙어 앉아 수플레를 먹고, 에이드도 마셨지 우리의 혈액은 아직 따뜻했고, 새벽달이 뜨는 날이면 서로의 몸에 오줌을 누는 것으로 영역을 확인했어 아, 얼마나 로맨틱한지 몰라 너는 없고 네 분위기만 남았어 침대는 좁고, 가진 건 5달러뿐이었지만 아무렇게나 뒹굴고 혀를 섞었지 브룩클린으로 떠나는 표를 끊던 날 너는 제일 야한 팬티를 챙기며 이걸 입고 반하지 않는다면 그건 무효야, 끼죽끼죽 웃었고 그게 우리의 마지막이라는 걸 예감하듯 우리는 우리만의 건기를 견뎠으나, 마침내 네 분위기만 남았어 네 눈물은 짜지 않았고, 총천연색으로 빛났고…… 기억..
2020.05.22 -
김하늘 / 데칼코마니
김하늘 / 데칼코마니 네가 낯설지 않아 나를 보는 것 같아서 좋아 내게서 너를 본떴거나 네게서 나를 훔쳐 왔다거나 어떤 식으로든 우리는 닮아 있어서, 너무 기쁜데, 이국적인 기분이 드는데, 너를 또는 나를 도대체 무엇을 사랑하는 게 이렇게 어둡고 숨 막히는 반짝임이었나, 우리는 골몰해 볼 필요가 있어 입술이 겹쳐질 때마다 느껴, 이 관계가 나팔꽃처럼 시시해지지는 않을까 빗소리가 뜨겁게 바닥을 달굴 때 물고기의 호흡법으로 간신히 생을 견디는 너와 부피도 없이 밀도만으로 살아남은 나를, 굳이 둘로 쪼개지 않아도 됨을 깨닫고, 나를 위로하기 위해 너를 내 풍경에 구겨 넣고, 나날이 낯빛이 흐려가는 카나리아처럼 우리는 우울한 식사를 하지 “공기가 시들고 있어.” “뭐가?” “우리가 불가능하..
2020.05.02 -
김하늘 / 나쁜 꿈
김하늘 / 나쁜 꿈 캄캄한 그 어디에서도 지금 잡은 내 손을 놓지 마. 네가 실재하는 곳에 내가 있어야 해. 우린 불편한 영혼을 공유했잖아. 우리는 미래가 닮아있으니까. 나를 설명하지 않아도 돼서 좋아. 주머니에 늘 수면제를 넣고 다니는 습관까지. 칼자국이 희미해지지 않는 자해의 흔적까지. 유령처럼 하얗고 작은 발가락까지. 비릿하고 나쁜 꿈을 꾸고 나면 온 몸에 개미떼가 기어 다니는 것 같아. 나쁜 게 뭘까. 좋고 싫은 건 있어도 착하고 나쁜 건 모르겠어. 근데 오늘 우리는 나쁜 꿈속에 버려져 있는 것 같아. 세상에 너하고 나, 둘 뿐인 것 같아. 가위로 우리 둘만 오려내서 여기에 남겨진 것 같아. 이런 게 나쁜 거야? 난 차라리 다행인데. 유서를 쓸 땐 서로 번갈아가면서 쓰자. 네가 ..
2020.03.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