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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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윤학 / 에델바이스
이윤학 / 에델바이스 초승달이 설산(雪山) 높이에서 눈보라에 찌그러지면서 헤매는 것, 내가 얼마만큼이라도 너에게 다가가고 있다는 증거다 창문보다 높은 골목길 발자국이 뜸한 새벽녘, 설산 어딘가에 솜털 보송한 네가 있다기에 나는 아직도 붉은 칸 원고지에 소설을 쓰는 거다 너와는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이라 너와는 이루어지는 소설을 쓰는 거다 곁에 있던 네가 내 안으로 들어와 이룰 수 없는 꿈을 같이 꾸는 거다 이윤학 / 에델바이스 (이윤학, 나를 울렸다, 문학과지성사, 2011) https://www.instagram.com/donkgrine/
2020.03.03 -
신미나 / 오이지
신미나 / 오이지 헤어진 애인이 꿈에 나왔다 물기 좀 짜줘요 오이지를 베로 싸서 줬더니 꼭 눈덩이를 뭉치듯 고들고들하게 물기를 짜서 돌려주었다 꿈속에서도 그런 게 미안했다 신미나 / 오이지 (신미나, 싱고, 라고 불렀다, 창비, 2014) https://www.instagram.com/donkgrine/
2020.02.28 -
황인찬 / "내가 사랑한다고 말하면 다들 미안하다고 하더라"
황인찬 / "내가 사랑한다고 말하면 다들 미안하다고 하더라" 공원에 떨어져 있던 사랑의 시체를 나뭇가지로 밀었는데 너무 가벼웠다 어쩌자고 사랑은 여기서 죽나 땅에 묻을 수는 없다 개나 고양이가 파헤쳐버릴 테니까 그냥 날아가면 좋을 텐데,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그날 꿈에는 내가 두고 온 죽은 사랑이 우리 집 앞에 찾아왔다 죽은 사랑은 집 앞을 서성이다 떠나갔다 사랑해, 그런 말을 들으면 책임을 내게 미루는 것 같고 사랑하라, 그런 말은 그저 무책임한데 이런 시에선 시체가 간데온데없이 사라져야 하는 법이다 그러나 다음 날 공원에 다시 가보면 사랑의 시체가 두 눈을 뜨고 움직이고 있다 황인찬 / "내가 사랑한다고 말하면 다들 미안하다고 하더라" (황인찬, 사랑을 위한 ..
2020.02.28 -
황인찬 / 무화과 숲
황인찬 / 무화과 숲 쌀을 씻다가 창밖을 봤다 숲으로 이어지는 길이었다 그 사람이 들어갔다 나오지 않았다 옛날 일이다 저녁에는 저녁을 먹어야지 아침에는 아침을 먹고 밤에는 눈을 감았다 사랑해도 혼나지 않는 꿈이었다 황인찬 / 무화과 숲 (황인찬, 구관조 씻기기, 민음사, 2012) https://www.instagram.com/donkgrine/
2020.02.28 -
강성은 / 12월
강성은 / 12월 씹던 바람을 벽에 붙여놓고 돌아서자 겨울이다 이른 눈이 내리자 취한 구름이 엉덩이를 내놓고 다녔다 잠들 때마다 아홉 가지 꿈을 꾸었다 꿈속에서 날 버린 애인들을 하나씩 요리했다 그런 날이면 변기 위에서 오래 양치질을 했다 아침마다 가위로 잘라내도 상처 없이 머리카락은 바닥까지 자라나 있었다 휴일에는 검은 안경을 쓴 남자가 검은 우산을 쓰고 지나갔다 동네 영화관에서 잠들었다 지루한 눈물이 반성도 없이 자꾸만 태어났다 종종 지붕 위에서 길을 잃었다 텅 빈 테라스에서 달과 체스를 두었다 흑백이었다 무성영화였다 다시 눈이 내렸다 턴테이블 위에 걸어둔 무의식이 입안에 독을 품고 벽장에서 뛰쳐나온 앨범이 칼을 들고 그대로 얼어붙었다 숨죽이고 있던 어둠이 미끄러져내렸다 어디선가 본 적 있는 음악이 ..
2020.02.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