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비(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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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우근 「파피루아」
우리는 선생님의 인솔 아래 스케치북을 들고 공원으로 향했다. 친구들은 팻말이 꽂힌 나무를, 짹짹거리는 작은 참새를, 하늘을 떠다니는 구름을 그리기 시작하고 나의 눈앞에는 푸른 나비가 어른거렸다. 일회용 카메라를 드는 사이 다른 세계로 떠난 나비를 스케치북에 되살렸다. 방과 후에는 도서관에서 나비 도감을 펼쳐 보았다. 삼천 종이 넘는 나비를 한 마리씩 넘기는 사이에 책을 읽던 친구들은 떠나가고, 해는 저물어 가고, 공원에서 본 나비를 찾지 못했지만 도서관을 나온 푸른 저녁에 나는 문득 파피루아라고 불러 본 것이다. 그리고 파피루아는 종교가 없는 내가 대성당에서 처음 기도를 올릴 때 떠올랐다. 군복을 입은 전우들은 각자의 소원 속에서 눈을 감았다. 내가 파피루아라고 속으로 말하면 검은 ..
2022.01.14 -
윤동주 / 병원
윤동주 / 병원 살구나무 그늘로 얼굴을 가리고 병원 뒤뜰에 누워, 젊은 여자가 흰옷 아래로 하얀 다리를 드러내놓고 일광욕을 한다. 한나절이 기울도록 가슴을 앓는다는 이 여자를 찾아오는 이, 나비 한 마리도 없다. 슬프지도 않은 살구나무 가지에는 바람조차 없다. 나도 모를 아픔을 오래 참다 처음으로 이곳에 찾아왔다. 그러나 나의 늙은 의사는 젊은이의 병을 모른다. 나한테는 병이 없다고 한다. 이 지나친 시련, 이 지나친 피로, 나는 성내서는 안 된다. 여자는 자리에서 일어나 옷깃을 여미고 화단에서 금잔화 한 포기를 따 가슴에 꽂고 병실 안으로 사라진다. 나는 그 여자의 건강이― 아니 내 건강도 속히 회복되기를 바라며 그가 누웠던 자리에 누워 본다. 윤동주 / 병원 (윤동주, 하늘과 바람과..
2020.12.27 -
주하림 / 반달 모양의 보지*
주하림 / 반달 모양의 보지* 1 챙 넓은 모자 검은 모발 희고 커다란 코 입이 귀까지 찢어진 죽음을 보았네 2 경기도에 산다고 했다 넋 나간 목소리 혀 꼬인 발음이 어둠 속에서도 반듯한 나를 더듬더듬 짚어가는데 그러나 언니…… 미안해요 난 벌써 약에 취했어요 도나웨일 노래를 듣고 있어요 mi, ZBC, HYUNGIN25 가운데가 움푹 들어간 게 수면제 그러니까 언니…… 대화라는 건 어렵지만 늘 내가 그린 그의 초상화를 가까이 두고 있어요 그가 왼쪽 눈을 감을 때 단숨에 스케치해나갔던, 너는 뭐 때문에 죽고 싶니 외로워 불쌍해? 실연이라 말하면 우리 합법적으로 만날 수 있나요? 같이 술을 마시고 포켓볼을 치며 쓸모없는 남자들을 꼬시며 언니…… 나는 사라지기 위해 사는 걸까 3 아니 여전..
2020.12.11 -
김사인 / 나비
김사인 / 나비 오는 나비이네 그 등에 무엇일까 몰라 빈 집 마당켠 기운 한낮의 외로운 그늘 한 뼘일까 아기만 혼자 남아 먹다 흘린 밥알과 김치국물 비어져나오는 울음일까 나오다 턱에 앞자락에 더께지는 땟국물 같은 울음일까 돌보는 이 없는 대낮을 지고 눈 시린 적막 하나 지고 가는데, 대체 어디까지나 가나 나비 그 앞에 고요히 무릎 꿇고 싶은 날들 있었다 김사인 / 나비 (김사인, 가만히 좋아하는, 창비, 2006) https://www.instagram.com/donkgrine/
2020.05.29 -
문정영 / 열흘나비
문정영 / 열흘나비 너는 나비처럼 웃는다. 웃는 입가가 나비의 날갯짓 같다. 열흘쯤 웃다보면 어느 생에서 어느 생으로 가는 지 잊어버린다. 너를 반경으로 빙빙 도는 사랑처럼 나비는 날 수 있는 신성을 갖고 있다. 아무도 찾지 못할 산속으로 날아가는 나비를 본 적이 있다. 죽음을 보이기 싫어하는 습관 때문이다. 너는 나비처럼 운다. 여름 끝자락에서 열흘을 다 산 것이다. 나는 너를 보기 위하여 산으로 가는데 가을이 먼저 오고 있다. 너에게 생은 채우지 못하여도 열흘, 훌쩍 넘겨도 열흘이다. 한 번 본 너를 붙잡기 위하여 나는 찰나를 산다. 열망을 향해 날아가는 너를 잡을 수 있는 날이 열흘뿐이나 나는 그 시간 밖에 있다. 문정영 / 열흘나비 (문정영, 그만큼, 시산맥사, 2017) htt..
2020.04.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