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담(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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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민혁 「38」
나는 너를 속되게 이르는 말. 방법을 모르니 인생은 영 재미가 없다. 개찰구를 사이에 두고 입 맞추던 일이나, 낯선 연립주택 불 꺼진 계단에 나란히 앉아, 미성년처럼 서로를 더듬던 일만 생각난다. 사실상 네가 관내분만한 슬픔이 이만큼이나 자랐다. 그리고 나의 활유 속에서 꽤 유복한 생을 누린다. 시인은 출구가 없는 미로를 그려서는 안 된다. 절망이라는 진부한 단어를 쓰고 싶지 않아서, 절망할 수도 없었다. 나는 심각한 정서 학대를 당했지만, 전혀 재밌지 않은 농담에도 아주 재밌다는 듯 실감 나게 웃어 줄 수 있다. 박민혁, 대자연과 세계적인 슬픔, 파란, 2021
2021.03.25 -
황인찬 / 퇴적해안
황인찬 / 퇴적해안 기억할 수 있는 가장 오래된 것은 어릴 적 보았던 새하얀 눈밭 살면서 가장 슬펐던 때는 아끼던 개가 떠나기 전 서로의 눈이 잠시 마주치던 순간 지루한 장마철, 장화를 처음 신고 웅덩이에 마음껏 발을 내딛던 날, 그때의 안심되는 흥분감이나 가족들과 함께 아무것도 아닌 농담에 서로 한참을 웃던 날을 무심코 떠올릴 때 혼자 짓는 미소 같은 것들 사소하고 작은 것들이 쌓이고 쌓여서 그런 것들에 떠밀려 여기까지 왔다는 생각을 하게 되는 평범한 주말의 오후 거실 한구석에는 아끼던 개가 엎드려 자기 밥을 기다리고 있었다 엄마, 얘가 왜 여기 있어 그럼 지금까지 다 꿈이야? 그렇게 물었을 때, 집에는 아무도 없었고 개만 엎드려 있었다 바깥에는 눈이 내린다 나는 개에게 밥..
2020.12.24 -
이문재 / 농담
이문재 / 농담 문득 아름다운 것과 마주쳤을 때 지금 곁에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하고 떠오르는 얼굴이 있다면 그대는 사랑하고 있는 것이다 그윽한 풍경이나 제대로 맛을 낸 음식 앞에서 아무도 생각하지 않는 사람 그 사람은 정말 강하거나 아니면 진짜 외로운 사람이다 종소리를 더 멀리 내보내기 위하여 종은 더 아파야 한다 이문재 / 농담 (이문재, 제국호텔, 문학동네, 2004) https://www.instagram.com/donkgrine/
2020.04.29 -
데이비드 웨이고너(David Wagoner) / 별들의 침묵
데이비드 웨이고너(David Wagoner) / 별들의 침묵 한 백인 인류학자가 어느 날 밤 칼리하리 사막에서 부시맨들과 이야기를 나누던 중 자신은 별들의 노랫소리를 들을 수 없다고 말했다. 그러자 부시맨들은 그의 말을 믿을 수 없어 했다. 그들은 미소를 지으며 그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그가 농담을 하고 있거나 자신들을 속이고 있다고 여기면서. 농사를 지은 적도 없고 사냥할 도구도 변변치 않으며 평생 거의 아무것도 가진 것 없이 살아온 두 명의 키 작은 부시맨이 그 인류학자를 모닥불에서 멀리 떨어진 언덕으로 데려가 밤하늘 아래 서서 귀를 기울였다. 그런 다음 한 사람이 속삭이며 물었다. 이제는 별들의 노랫소리가 들리느냐고. 그는 의심스런 사람이 되고 싶진 않았지만 아무리 해도 들리지..
2020.04.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