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보라(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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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우신 「베이스캠프」
빛이 사라지고 있었다 나는 염소 발목을 부러트려 십자가를 만들었다 우리는 눈보라의 어디쯤을 짚어보고 있을까 난로 위에서는 물이 끓고 나는 네가 기타 가방에 그려놓은 동물이 오길 기다렸다 뿔과 날개가 있고 다리가 없는 그 동물, 우리의 얼굴이 반반 섞여 있는 그 동물 내가 위태로울 때면 너는 따듯한 술잔을 들고 꿈에 나타났다 우리는 머나먼 바다까지 흘러가기도 하고 사냥당한 염소 가죽을 뒤집어쓰고 별을 바라보곤 했다 침낭 지퍼를 머리끝까지 잠그고 죽음의 두께에 대해 생각했다 네가 먼저 갔듯이 눈발은 발자국을 오래 남기지 않는다 기도를 하다가 멈추면 눈이 쌓이는 소리가 더 잘 들린다 정우신, 홍콩 정원, 현대문학, 2021
2021.04.26 -
이윤학 / 에델바이스
이윤학 / 에델바이스 초승달이 설산(雪山) 높이에서 눈보라에 찌그러지면서 헤매는 것, 내가 얼마만큼이라도 너에게 다가가고 있다는 증거다 창문보다 높은 골목길 발자국이 뜸한 새벽녘, 설산 어딘가에 솜털 보송한 네가 있다기에 나는 아직도 붉은 칸 원고지에 소설을 쓰는 거다 너와는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이라 너와는 이루어지는 소설을 쓰는 거다 곁에 있던 네가 내 안으로 들어와 이룰 수 없는 꿈을 같이 꾸는 거다 이윤학 / 에델바이스 (이윤학, 나를 울렸다, 문학과지성사, 2011) https://www.instagram.com/donkgrine/
2020.03.03 -
홍일표 / 북극 거미
홍일표 / 북극 거미 사과가 붉은 것은 햇볕의 농담이라고 말하는 순간 내 손은 순록의 뿔이 된다 다 안다는 듯 아이가 물방울처럼 웃는다 전화번호를 지우고 주소를 지우고 마지막 저녁의 표정도 지운다 새롭게 얼굴을 내민 아침의 각도가 거미줄에 걸려 있다 거미줄에서 부서지던 햇살들이 폭설로 흩날리는 밤에 나는 공중의 혈맥을 더듬던 금빛 거미를 찾는다 어제 살았던 아침을 껍질이 벗겨질 때까지 씻어내다가 어느덧 나는 국경 밖의 눈보라가 된다 열두 시간 전에 이국의 골목에서 듣던 눈썹 흰 노래였다 사라진 손으로 귀에 도착하지 않은 북극의 물소리를 만지는 밤 툰트라의 측백나무로 서서 여자의 몸에서 자라는 달을 본다 나는 들개 울음소리가 들리는 밤의 중심에서 밤을 포획하는 금빛 거미를 찾는..
2020.03.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