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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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솔아 / 아홉 살
임솔아 / 아홉 살 도시를 만드는 게임을 하고는 했다. 나무를 심고 호수를 만들고 빌딩을 세우고 도로를 확장했다. 나의 시민들은 성실했다. 지루해지면 아이 하나를 집어 호수에 빠뜨렸다. 살려주세요 외치는 아이가 얼마나 버티는지 구경했다. 살아 나온 아이를 간혹은 살려두었고 다시 집어 간혹은 물에 빠뜨렸다. 아이를 아무리 죽여도 도시는 조용했다. 나는 빌딩에 불을 놓았다. 허리케인을 만들고 전염병을 퍼뜨리고 UFO를 소환해서 정갈한 도로들을 쑥대밭으로 만들었다. 선량한 시민들은 머리에 불이 붙은 채 비명을 지르며 뛰어다녔다. 내 도시 바깥으로 도망쳤다. 나는 도시를 벽으로 둘러쌌다. 그러나 모든 것을 태우지는 않았다. 나의 시민들이 다시 도시를 세울 수 있을 정도로만 나..
2020.09.20 -
김이듬 / 동시에 모두가 왔다
김이듬 / 동시에 모두가 왔다 도시의 군중 속으로 나는 사라진다 이렇게 눈비가 한꺼번에 올 때 우산을 세우고 천천히 걷는다 나에게는 즐거워할 일과 돌아버릴 일이 동시에 왔고 사건에 묻어 사건들이 들이닥쳤으며 친구들은 패거리로 몰려왔다가 떠났다 한쪽 눈썹을 치켜들려면 다른 눈썹도 들린다 가령 이런 식이다 남자 친구의 아버지가 소파를 바로잡은 후 내 등에 쏟았던 정액을 닦아내고 간지러워하며 내가 팬티를 추켜올리려는 순간 초인종을 누르지도 않고 남자 친구가 들어왔던 것이다 나의 새어머니가 내게 고분고분해질 즈음 딸을 내놔라 소리치며 죽었던 엄마가 살아 돌아왔던 식이다 이렇게 동시에 진행되는 일들은 가령 우산을 접을 것인가 세울 것인가 눈이 먼저냐 빗방울이 먼저냐 식의 사소한 번민 속으로 나를 데려간..
2020.07.29 -
강우식 / 선거 유세장에서
강우식 / 선거 유세장에서 사람은 어디 가고 잘 먹고 잘 입고 잘사는 것만이 민주주의가 되어 있다. 유령에 홀렸는가. 일백만이 살지 않는 도시에 일백만 이상의 인파가 모인다. 상상은 상식이 아니다 현실은 상상을 초월하여 기적을 낳는다. 피켓에, 풍선에 그려진 유령들의 모습이 뚜렷하다 부적처럼 들고 흔들며 신명이 나서 굿풀이도 한다. 정오에 나는 내 돈으로 소주 한잔을 사먹었다. 마치 하느님 같은 선심 속에서 나는 억울했다. 인생은 유령들의 잔치인가 떠드는 자의 말의 성찬이 듣는 자보다 더 무책임하다 떠들고 나면 대학 강단에서의 내 시론처럼 괴로울 것이다. 모든 사람들은 지지자와 함께 자폭하려 한다. 가까울수록 거리를 두고 사랑해야 한다. 강우식 / 선거 유세장에서 ..
2020.04.17 -
황인찬 / 부곡
황인찬 / 부곡 폐업한 온천에 몰래 들어간 적이 있어 물은 끊기고 불은 꺼지고 요괴들이 살 것 같은 곳이었어 센과 치히로에서 본 것처럼 너는 그렇게 말하고 눈을 감았다 도시에는 사람들이 살지 않는다 다들 어디론가 멀리 가버렸어 풀이 허리까지 올라온 공원 아이들이 있었던 세상 세상은 이제 영원히 조용하고 텅 빈 것이다 앞으로는 이 고독을 견뎌야 한다 그렇게 생각하면 조금은 마음이 편해진다 긴 터널을 지나 낡은 유원지를 빠져나오면 사람들이 많았다 너무 많았다 황인찬 / 부곡 (황인찬, 사랑을 위한 되풀이, 창비, 2019) https://www.instagram.com/donkgrine/
2020.03.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