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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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백규 「수목한계」
우리에게 사랑은 새를 기르는 일보다 어려웠다 꿈 바깥에서도 너는 늘 나무라 적고 발음한 후 정말 그것으로 자라는 듯했다 그런 너를 보고 있으니 어쩐지 나도 온전히 숲을 이루거나 그 아래 수목장 된 것 같았다 매일 꿈마다 너와 누워 있는 장례였다 시들지 않은 손들이 묵묵히 얼굴을 쓸어가고 있었다 부수다 만 유리온실처럼 여전히 살갗이 눈부시고 따사로웠다 돌아누운 등을 끌어안고서 아무 일도 아직은 피어나지 않을 거라 말해주었다 양안다, 최백규, 너는 나보다 먼저 꿈속으로 떠나고, 기린과숲, 2021
2021.07.09 -
서윤후 「누가 되는 슬픔」
슬픔에게서 재주가 늘어나는 것 같아 녹슨 대문 앞을 서성거리는 사람을 글썽거린다고 생각한 적 있었지 망설이던 말이 발을 절며 다가와 매일 낭떠러지에 있다고 나를 종용하고 이제 등에 몰두하자는 말을 했지 두 눈동자의 주름을 펼치며 바라보자고 했지 그러나 너무 많은 슬픔이 기성품이 되어 집에 돌아온다 누구나 붙잡고 말하게 되는 마른 헝겊이 모자란 세계로 출국하고 바닷바람 머금은 손수건을 선물하지 이 모르는 슬픔이 움직이는 이유를 잠깐 떠들고 싶다 비행운의 연기력처럼 포로의 잠꼬대를 닮은 위로만 해댔지 더이상 나눌 수 없는 슬픔은 등에 업고 가려고 해 그 끝이 어딘지 모르지만 헤맬수록 정확해지는 그 주소로 향하려고 해 슬픔의 묘기가 나를 흉내낸다 눈물을 훔치던 네가 어디까지 이야기..
2021.06.18 -
유이우 / 부드러운 거리
유이우 / 부드러운 거리 미소짓는 마음만 둥근 거라던 사랑하는 골목이 강박을 약간 치우면서 원하는 그 느낌으로 살기 위하여 되돌아 와서는 얼마간의 새로운 세계들을 계속 등 뒤로 보내는 거야 유이우 / 부드러운 거리 (편집부, 시마당 봄호, 시마당, 2020) https://www.instagram.com/donkgrine/
2020.12.27 -
최지인 / 기다리는 사람
최지인 / 기다리는 사람 회사 생활이 힘들다고 우는 너에게 그만두라는 말은 하지 못하고 이젠 어떻게 살아야 하나 고민했다 까무룩 잠이 들었는데 우리에게 의지가 없다는 게 계속 일할 의지 계속 살아갈 의지가 없다는 게 슬펐다 그럴 때마다 서로의 등을 쓰다듬으며 먹고살 궁리 같은 건 흘려보냈다 어떤 사랑은 마른 수건으로 머리카락의 물기를 털어내는 늦은 밤이고 아픈 등을 주무르면 거기 말고 하며 뒤척이는 늦은 밤이다 미룰 수 있을 때까지 미룬 것은 고작 설거지 따위였다 그사이 곰팡이가 슬었고 주말 동안 개수대에 쌓인 컵과 그릇 등을 씻어 정리했다 멀쩡해 보여도 이 집에는 곰팡이가 떠다녔다 넓은 집에 살면 베란다에 화분도 여러 개 놓고 고양이도 강아지도 키우고 싶다고 그러려면 얼마의 돈이 필요..
2020.11.18 -
김경후 / 겹
김경후 / 겹 등을 마주 댄 두줄의 척추 우린 나눌 수 없어 잠들지 못한다 단 하나의 태양이 단 하나의 태양을 덮을 때까지 우린 서로의 개기월식일 뿐 올봄 겹벚꽃 한번도 피지 않고 진다 김경후 / 겹 (김경후, 오르간, 파이프, 선인장, 창비, 2017) https://www.instagram.com/donkgrine/
2020.08.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