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신(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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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혜미 / 습기의 나날
이혜미 / 습기의 나날 손끝마다 안개를 심어둔 저녁에는 익사한 사람의 발을 만지는 심정으로 창을 열었다 젖은 솜으로 기운 외투를 덮고 잠드는 나날이었다 몸 안의 물기를 모두 공중으로 흩뿌리고서야 닿을 수 있는 탁한 피의 거처가 있다 내 속을 헤엄치던 이는 순간의 바다로 흘러갔다 젖어들고 나서야 문장의 끝이 만져지는 기이한 세계 굳어버린 혀에 안개가 서리면 입속은 수레국화를 머금은 듯 자욱해진다 어깨를 털어내는 새의 깃털 속에서 계절은 문득 오랜 미신이 되었다 이혜미 / 습기의 나날 (이혜미, 뜻밖의 바닐라, 문학과지성사, 2016) https://www.instagram.com/donkgrine/
2020.11.28 -
이병률 / 미신
이병률 / 미신 필명을 갖고 싶던 시절에 두 글자의 이름 도장도 갖고 싶어 도장 가게에 가서 성과 이름을 합쳐도 두 글자밖에 인 되는 도장을 파려고 하는데 돈을 적게 받을 수 있느냐 물었다 하지만 남들보다 더 많은 여백을 파내야 하는 수고가 있으니 오히려 더 받아야겠다는 도장 파는 이의 대답을 들었다 다 늦은 그날 밤 술 마시고 집으로 가는 길 한 잔만 더 마시면 죽을 수도 있고 그 한 잔으로 어쩌면 잘 살 수도 있겠다 싶어 들어간 어느 포장마차에서 딱 한 잔만 달라고 하였다 한 잔을 비우고 난 뒤 한 병 값을 치르겠다고 하자 주인이 술값을 받지 않겠다고 했다 당신이 취하기 위해 필요한 건 한 잔이 아니었냐며 주인은 헐거워진 마개로 술병을 닫았다 바지 주머니엔 도장이 불룩하고..
2020.08.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