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자국(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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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희연 「설경」
다 망가져버렸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어 눈이나 펑펑 와버렸으면 지나고 보니 모든 게 엉망이어서 개들이라도 천방지축 환하게 뛰어다닐 수 있게 새하얀 눈밭이었으면, 했지 그래서 그리기 시작했다네, 눈에 파묻힌 집 눈만 마주쳐도 웃음을 터뜨리던 두 사람이 이제 더 이상 살지 않는 집 깨진 계란껍질 같던 마음도 같이 파묻었지 캔버스 앞으로 모여드는 사람이 많았다 아무도 밟지 않은 흰 눈에는 그런 힘이 있으니까 곰은 곰의 발자국을 찍고 가고 바람은 바람의 발자국을 찍고 가고 모두들 자기 발자국을 들여다보기에 바빴다 그 집은 악몽으로 가득 차 있다고 소리쳐도 아무도 믿지 않았다 지붕까지 파묻힌 집이 어떻게 공포스럽지 않은 거야? 내게는 모든 게 엉망이었던 시간인데 사랑과 낮잠은 참 닮은 구석이..
2021.03.21 -
유이우 / 층계참
유이우 / 층계참 발자국을 숨 쉬는 계단이다 걸음이 떠나면 언제나 우리의 흐릿한 박자가 남아 있어 올라가면서 내려가면서 우리들은 자기 자신으로 날아가면서 창문을 한번 바라보았다 생각 속에 살다가 푸른 것을 생각 속에 살다가 푸르른 것을 발가락이 다 쏟아질 듯하면서 우리는 우리의 실루엣을 벗어나는 것들과 날으는 새들까지도 간직할 수 없는 세상에서 공중을 낭비하는 기다림 유이우 / 층계참 (유이우, 내가 정말이라면, 창비, 2019) https://www.instagram.com/donkgrine/
2020.03.30 -
김경인 / 금요일에서 온 사람
김경인 / 금요일에서 온 사람 내가 어디에서 왔는지 기억하지는 않아요 나는 절룩거렸고 나는 뒤로 걸었고 어제는 청어를 먹고 드라이브를 떠났어요 가시 많은 고슴도치처럼 껴안았죠 우리에겐 지도가 없었고 난 어제, 라는 말을 가장 좋아하지만 설명할 수는 없어요 그건 오른쪽이나 왼쪽일 거예요 흙먼지 속에서 뿌옇게 지워진 내가 걸어왔다면 아마 거길 거예요 사람들은 아주 가끔 신기한 듯 물었죠 너는 참 이상하게 걷는구나, 길을 끌고 다니듯 그건 아마 내 안의 길들이 무릎 아래로 끌어당기기 때문이겠죠 당신이 걷는 길에 내 발자국이 찍혀 있다면 끝나지 않는 골목과 높은 담들 늙어서도 울고 있는 아이를 지나 그렇게 왔을 거예요 그건 긴긴 금요일의 길 위에서였을 거예요 김경인 / 금요일에서 온..
2020.03.04 -
이윤학 / 에델바이스
이윤학 / 에델바이스 초승달이 설산(雪山) 높이에서 눈보라에 찌그러지면서 헤매는 것, 내가 얼마만큼이라도 너에게 다가가고 있다는 증거다 창문보다 높은 골목길 발자국이 뜸한 새벽녘, 설산 어딘가에 솜털 보송한 네가 있다기에 나는 아직도 붉은 칸 원고지에 소설을 쓰는 거다 너와는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이라 너와는 이루어지는 소설을 쓰는 거다 곁에 있던 네가 내 안으로 들어와 이룰 수 없는 꿈을 같이 꾸는 거다 이윤학 / 에델바이스 (이윤학, 나를 울렸다, 문학과지성사, 2011) https://www.instagram.com/donkgrine/
2020.03.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