밥(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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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인찬 / 퇴적해안
황인찬 / 퇴적해안 기억할 수 있는 가장 오래된 것은 어릴 적 보았던 새하얀 눈밭 살면서 가장 슬펐던 때는 아끼던 개가 떠나기 전 서로의 눈이 잠시 마주치던 순간 지루한 장마철, 장화를 처음 신고 웅덩이에 마음껏 발을 내딛던 날, 그때의 안심되는 흥분감이나 가족들과 함께 아무것도 아닌 농담에 서로 한참을 웃던 날을 무심코 떠올릴 때 혼자 짓는 미소 같은 것들 사소하고 작은 것들이 쌓이고 쌓여서 그런 것들에 떠밀려 여기까지 왔다는 생각을 하게 되는 평범한 주말의 오후 거실 한구석에는 아끼던 개가 엎드려 자기 밥을 기다리고 있었다 엄마, 얘가 왜 여기 있어 그럼 지금까지 다 꿈이야? 그렇게 물었을 때, 집에는 아무도 없었고 개만 엎드려 있었다 바깥에는 눈이 내린다 나는 개에게 밥..
2020.12.24 -
오은 / 내일의 요리
오은 / 내일의 요리 내일은 언제나 배가 고픕니다 식욕이 베이킹파우더처럼 부풀어 오릅니다 모레를 위해서라도 사방에 소금을 뿌려야 합니다 뒷맛이 씁니다 오늘은 밥을 먹습니다 마음이 글루텐처럼 죽죽 늘어납니다 피부에 윤기가 자르르 흐릅니다 너를 생각하느라 첫맛을 느낄 겨를이 없습니다 어제는 쌀을 씻었습니다 신경을 쓰고 주의를 기울였습니다 하나의 명사를 위해 너무 많은 동사들을 소모했습니다 편지를 쓰고 해가 기울었는데도 아무도 오지 않았습니다 양 볼에 눈물이 주르르 흘렀습니다 너를 생각하느라 밥은 끓기도 전에 식을 준비를 하고 있었습니다 오은 / 내일의 요리 (오은, 유에서 유, 문학과지성사, 2016) https://www.instagram.com/donkgrine/
2020.08.23 -
고영민 / 끼니
고영민 / 끼니 1 병실에 누운 채 곡기를 끊으신 아버지가 그날 아침엔 밥을 가져오라고 하셨다 너무 반가워 나는 뛰어가 미음을 가져갔다 아버지는 아주 작은 소리로 그냥 밥을 가져오라고 하셨다 아주 천천히 오래오래 아버지는 밥을 드셨다 그리고 다음날 돌아가셨다 2 우리는 원래와 달리 난폭해진다 때로는 치사해진다 하찮고 사소한 것에 목숨을 걸기도 한다 가진 게 그것뿐이기 때문이다 그것이 전부이기 때문이다 한겨울, 서울역 지하도를 지나다가 한 노숙자가 자고 있던 동료를 흔들어 깨워 말하는 것을 들은 적이 있다 먹어둬! 이게 마지막일지 모르잖아 고영민 / 끼니 (고영민, 사슴공원에서, 창비, 2012) https://www.instagram.com/donkgrine/
2020.07.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