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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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백규 「해적 방송」
이제 우리는 서로의 이방인이다 희고 뜨거운 밥상을 수백 번 물릴 때까지 한 줄도 그대를 잊지 못했다 지구로 향하던 운석이 환하게 흩어지고 가족을 가진 인간들이 집으로 파한 이후의 광장이 있다 후드를 입고 슈퍼스타 밑창이 닳아가도록 보드가 아스팔트를 갈랐다 청바지에 손을 숨긴 채 도로 끝을 바라보았다 양치를 하고 외투를 벽에 걸고서 유난히 하얗던 지난여름의 일들을 생각하며 식료품을 정리하다가 의자에 앉아 느리게 연필을 깎는다 안다 머리를 묶지 않는 그대의 귀가 아름답다는 사실을 쉽게 죄를 짓던 손으로 블록을 조립하고 합정역에서 상수역까지 걸었다 웃음을 지어야만 했다 지인과 연락을 끊고 모르는 사람을 용서하고 조용히 야위어가며 식은 바닥에서 잠을 자다가 눈이 떠지면 일어나서 산다 ..
2022.01.14 -
윤동주 / 병원
윤동주 / 병원 살구나무 그늘로 얼굴을 가리고 병원 뒤뜰에 누워, 젊은 여자가 흰옷 아래로 하얀 다리를 드러내놓고 일광욕을 한다. 한나절이 기울도록 가슴을 앓는다는 이 여자를 찾아오는 이, 나비 한 마리도 없다. 슬프지도 않은 살구나무 가지에는 바람조차 없다. 나도 모를 아픔을 오래 참다 처음으로 이곳에 찾아왔다. 그러나 나의 늙은 의사는 젊은이의 병을 모른다. 나한테는 병이 없다고 한다. 이 지나친 시련, 이 지나친 피로, 나는 성내서는 안 된다. 여자는 자리에서 일어나 옷깃을 여미고 화단에서 금잔화 한 포기를 따 가슴에 꽂고 병실 안으로 사라진다. 나는 그 여자의 건강이― 아니 내 건강도 속히 회복되기를 바라며 그가 누웠던 자리에 누워 본다. 윤동주 / 병원 (윤동주, 하늘과 바람과..
2020.12.27 -
최백규 / 낙원
최백규 / 낙원 그해 봄은 성한 곳 없이 열을 앓았다 살을 맞대어 서로에게 병을 안겨주던 시절이었다 눈더미처럼 누워 화관을 엮었다 불 지르고 비가 쏟아지는 날에도 창을 열어두고 살았다 보낸 적도 없는데 돌아오지 않는 일이 있어서 문턱을 쓸듯이 늦은 저녁을 차리며 끓어 넘치지 않도록 들여다보는 사이 과일은 무르고 이마가 식지 않았다 최백규 / 낙원 (창작동인 뿔, 한 줄도 너를 잊지 못했다, 아침달, 2019) https://www.instagram.com/donkgrine/
2020.09.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