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닐봉지(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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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희연 / 12월
안희연 / 12월 겨울은 빈혈의 시간 피주머니를 가득 매단 크리스마스트리 같은 것만 생각나 입김 한 번에 허물어지는 사람들이 이곳엔 너무너무 많다 너무라고 말하지 않고 너무너무라고 말하는 것 그래도 겨울은 눈 하나 끔뻑하지 않겠지 그래서 당신은 무엇으로 살아가는 사람입니까 강도를 높여가는 겨울의 질문 앞에서 나는 나날이 창백해진다 이렇게 텅 빈 마음으로 살아가도 괜찮을 걸까 기도가 기도를 밟고 오르는 세상에서 헐렁헐렁 산책하는 일 검은 비닐봉지에 담긴 축축한 영혼을 나라고 부르는 일 다행히 겨울은 불을 피우기 좋은 계절이다 나에겐 태울 것이 아주 많고 재가 될 때까지 들여다볼 것이 있어서 좋다 "잘하고 못하는 게 어디 있어, 그냥 사는 거지" 불 앞에서 다 식은 진..
2020.07.05 -
허연 / 삽화
허연 / 삽화 알약들처럼 빗방울이 성긴 저녁. 용케 젖지 않은 자들의 안도 속에 하루가 접히고 있었다. 퇴근 무렵. 아버지가 당신의 결혼사진을 들고 찾아왔다. 자꾸 빛이 바랜다며 어떻게 할 수 없겠냐고 비닐봉지에 싸온 사진을 내밀었다. 사진 속 어머니의 드레스는 이제 완벽한 황토색이다. 친일파와 빨갱이 집안의 결합. 하객보다 기관원이 더 많았다는 집안 내력을 생각하며, 곁눈질로 사진을 보며, 나는 꼬리곰탕을 후후 불었다. 속으론 "살아 계실 때 잘 좀 하시지"라고 투덜댔지만, 반주까지 걸친 다혈질의 아버지에게 그 말은 차마 꺼내지 못했다. 비는 다음 날에도 계속됐고, 나는 비닐에 싸인 빛바랜 사진을 옆구리에 끼고 충무로 골목길을 헤맸다. 오늘도 뭔가 포기하지 않는 새들만 비를..
2020.06.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