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명(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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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대경 / 여우계단
서대경 / 여우계단 여우계단 꿈에서 밝은 허공을 만나고 돌아오는 길에는 잿빛의 높은 담벽들이 골목 양편으로 끝없이 뻗어나갑니다 하수구에서 올라온 검은 쥐들이 일렬로 벽 위를 기어갑니다 나는 담벽에 매달려 저편에 서 있는 못 보던 공장들과 못 보던 아버지들을 봅니다 공장 굴뚝에서 검은 연기가 피어오릅니다 아버지는 목장갑을 벗고 철근 더미 위에 앉아 담배를 뭅니다 공장 앞으로 흑백의 강이 흘러갑니다 아버지 곁에 누워 있던 개들이 일제히 송곳니를 드러내며 이쪽을 향해 짖어댑니다 나는 조금 걸음을 빨리합니다 계단을 올라가는데 어릴 적 동화에서 보았던 작은 여우가 보였습니다 여우는 계단 한쪽 구석에서 빙빙 맴을 돕니다 잔뜩 찌푸린 하늘 아래서 여우는 은은히 빛납니다 속삭임이 퍼지고 여우의 율동이 밝..
2020.11.29 -
박연준 / 융단, 모르핀, 매니큐어에게
박연준 / 융단, 모르핀, 매니큐어에게 까만 바다에 빠져봤어? 사람들은 날마다 바다의 도시화를 꿈꾸지 두려워하지 마 내 상체가 해초처럼 흔들리고 팔이 별안간 여덟 개가 되지 어젯밤 너희 셋을 위해 팔을 다섯 개나 뽑았어 그런데 왜 먹지 않았니? 전화벨이 끊겼다, 이어졌다 반복되고 나는 그 반복 사이에서 액체가 된다 보글보글, 기다림이 삭는 소리 소리는 물속에 잠기면 진동이 되지 그건 물들의 비명이야 사랑을 잃고, 띄엄띄엄 울다 자는 밤 산화되는 기억 속 너희들의 지느러미, 누군가를 부르는 파닥이는 힘- 하늘을 봐 바람이 별을 작곡하고 있어 박연준 / 융단, 모르핀, 매니큐어에게 (박연준, 아버지는 나를 처제, 하고 불렀다, 문학동네, 2012) https://www.instagram.com/d..
2020.04.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