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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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은경 / 비의 교훈
김은경 / 비의 교훈 한여름 폭우 같은 봄비 쏟아지다 밤을 이어 내리던 빗줄기는 아침이 와도 잦아들지 않고 이번 생의 교훈이라면 다섯 번의 연애를 하는 사람은 다섯 번의 생을 살고 아흔아홉 번의 이별을 하는 사람은 아흔아홉 번의 생을 산다는 것 마흔 살의 나는 벌써 백발 할머니가 된 기분이야, 그런 독백이나 중얼거리며 비 맞고 서 있다 읍내 목욕탕서 종일 뒹굴다 온 날처럼 열 손가락이 쪼글쪼글하다 김은경 / 비의 교훈 (김은경, 우리는 매일 헤어지는 중입니다, 실천문학사, 2018) https://www.instagram.com/donkgrine/
2020.09.02 -
류시화 / 바르도에서 걸려 온 수신자 부담 전화
류시화 / 바르도에서 걸려 온 수신자 부담 전화 1 달 표면 오른쪽으로 거미가 기어간다 월식의 흰 이마 쪽으로 어느 날 그런 일이 일어난다 밤늦은 시각 한 통의 전화가 걸려 온다 허공에서 허공으로 흰 빗금을 그으며 산목련이 떨어지기 직전이었을 것이다 거미가 달의 뒷면으로 사라지기 전이었을 것이다 텅 비고 깊고 버려진 목소리 망각의 정원에 핀 환영의 꽃 같고 육체를 이탈한 새의 영혼 같고 얼마큼의 광기 같은 당신 거기서 잘 지내고 있어요? 난 잘 지내고 있어요, 당신은요? 전화는 연결 상태가 좋지 않다 당신 아직도 거기 있어요? 당신 아직 거기 있어요? 2 지상에서의 삶은 어떤가요 매화는 피었나요 소복이 삼월의 마지막 눈도 내렸나요 지난번 가시에 찔린 상처는 아물었나요 그 꽃가지 ..
2020.07.02 -
문정영 / 열흘나비
문정영 / 열흘나비 너는 나비처럼 웃는다. 웃는 입가가 나비의 날갯짓 같다. 열흘쯤 웃다보면 어느 생에서 어느 생으로 가는 지 잊어버린다. 너를 반경으로 빙빙 도는 사랑처럼 나비는 날 수 있는 신성을 갖고 있다. 아무도 찾지 못할 산속으로 날아가는 나비를 본 적이 있다. 죽음을 보이기 싫어하는 습관 때문이다. 너는 나비처럼 운다. 여름 끝자락에서 열흘을 다 산 것이다. 나는 너를 보기 위하여 산으로 가는데 가을이 먼저 오고 있다. 너에게 생은 채우지 못하여도 열흘, 훌쩍 넘겨도 열흘이다. 한 번 본 너를 붙잡기 위하여 나는 찰나를 산다. 열망을 향해 날아가는 너를 잡을 수 있는 날이 열흘뿐이나 나는 그 시간 밖에 있다. 문정영 / 열흘나비 (문정영, 그만큼, 시산맥사, 2017) htt..
2020.04.10 -
복효근 / 타이어의 못을 뽑고
복효근 / 타이어의 못을 뽑고 사랑했노라고 그땐 또 어쩔 수 없었노라고 지금은 어디서 어떻게 사는지도 모를 너를 찾아 고백하고도 싶었다 ―그것은 너나 나의 가슴에서 못을 뽑아버리고자 하는 일 그러나 타이어에 박힌 못을 함부로 잡아 뽑아버리고서 알았다 빼는 그 순간 피식피식 바람이 새어 나가 차는 주저앉고 만다 사는 일이 더러 그렇다 가슴팍에 대못 몇 개 박아둔 채 정비소로 가든지 폐차장으로 가든지 갈 데까지는 가는 것 갈 때까지는 가야 하는 것 치유를 꿈꾸지 않는 것 꿈꾼대도 결국 치유되지 않을 것이므로 대못이 살이 되도록 대못을 끌어안는 것 때론 대못이 대못 같은 것이 생이 새어나가지 않게 그러쥐고 있기도 하는 것이다 복효근 / 타이어의 못을 뽑고 (복효근, 따뜻한 외면, ..
2020.03.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