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4)
-
김연덕 「사월 비」
쓰다듬거나 모으지 않아도 괜찮아 샌드위치를 반으로 자르고 빠져나온 아보카도를 줍고 들기 남김없이 먹기 손에서 손 아닌 걸 빼 보세요 무엇이 남는지 무엇이 가는지 무엇이 소리치는지 보고 그래도 두세요 그러니까 궁금해하지도 따뜻해지지도 움켜쥐지도 않기 세계는 이미 한 번 죽은 재료들 열렬하게 포기해 상한 냄새를 좋아해요 전등의 것도 식탁의 것도 아닌 그림자가 손바닥에 떠 있다 의지 없이 할 수 있는 일도 있다 오늘은 우산을 들고 좋아하는 샌드위치 가게에 갈 거야 우산을 접고 안으로 들어갈 거야 이마에 떨어진 빗방울만 믿고 비가 오는구나 작게 뱉어 볼 것 떨지 않아도 좋지만 떨어도 좋다 김연덕, 재와 사랑의 미래, 민음사, 2021
2021.08.19 -
김재훈 / 월식
김재훈 / 월식 너는 너의 바깥에 서 있었다 손에 쥔 모래를 표정 없이 떨어뜨리는 소녀가 생각 없는 생각에 잠겨 있다가 주먹 속의 모래가 모두 빠져나간 뒤에 문득 놀라 빈 손바닥을 펼쳐 볼 때 처음 들른 여인숙 방의 형광등 스위치를 더듬듯이 너는 내 안으로 들어왔다 어디 갔다 온 거니 손이 차구나 김재훈 / 월식 (미등록, 문학동네 2011.겨울, 문학동네, 2011) https://www.instagram.com/donkgrine/
2020.05.02 -
주하림 / 작별
주하림 / 작별 혐오라는 말을 붙여줄까 늘 죽을 궁리만 하던 여름날 머리를 감겨주고 등 때도 밀어주며 장화를 신고 함께 걷던 애인조차 떠났을 때 나는 사라지기 위해 살았다 발 아픈 나의 애견이 피 묻은 붕대를 물어뜯으며 운다 그리고 몸의 상처를 확인하고 있는 내게 저벅저벅 다가와 간신히 쓰러지고는, 그런 이야기를 사람의 입을 벌려 말할 것만 같다 '세상의 어떤 발소리도 너는 닮지 못할 것이다' 네가 너는 아직도 어렵다는 얘기를 꺼냈을 때 나는 우리가 한번이라도 어렵지 않은 적이 있냐고 되물었다 사랑이 힘이 되지 않던 시절 길고 어두운 복도 우리를 찢고 나온 슬픈 광대들이 난간에서 떨어지고, 떨어져 살점으로 흩어지는 동안 그러나 너는 이상하게 내가 손을 넣고 살며시 기댄 사람이었다 주하..
2020.02.28 -
황인찬 / 독개구리
황인찬 / 독개구리 내가 잡아온 독개구리 한 마리 예쁘다 개골거린다 죽은 척 가만히 있는다 만지면 독이 오른다 그런데도 나는 잡아왔지 손이 퉁퉁 부었다 저녁이 오는 것을 나는 본다 검은 두 눈으로 내가 어제 접어 놓은 시집에는 개구리가 없다 청개구리는 독이 없다 아프리카 독개구리의 독은 극소량으로 인간을 죽일 수 있다 이곳에는 생활이 없다 방바닥에 들러붙은 마사지 오이가 말랐다 뜨끈한 기운이 올라온다 독개구리가 먹는 것은 산 것뿐이다 사위가 어둡다 머리를 감고, 몸을 씻고, 옷을 입고, 의자에 앉았다 밀린 일을 생각하고 옛 애인을 생각하다 읽던 시가 생각나 시집에 손을 뻗다 책상 위에 앉은 그것을 보았다 나는 극소량의 공포를 느꼈다 황인찬 / 독개구리 (황인찬, 구관조 ..
2020.02.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