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체(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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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승일 「나는 모스크바에서 바뀌었다」
나는 무서운 것이 너무 많고 비위도 약하지만 내가 시체 청소부면 좋겠다 초등학교 앞에 시체가 나타나면 아이들이 떼로 몰려서 시체를 둘러싸고 서서 그걸 보고 있다 한마디씩 하는 애들도 있고 아닌 애들도 있지 애들도 시체를 봐야 시체가 어떤 것인지 알겠지만 나는 시체가 너무 불쌍해서 시체를 들고 먼 곳으로 간다 아무도 보고 수군거리거나 침묵하지 않도록 그때 나는 아직 어린아이고 시체는 대부분 축축하고 무겁다 나는 내가 애면 좋겠다 천만 명이면 좋겠다 어린애들이 있는 곳이면 거기 항상 있는 시체가 나타나면 들고 먼 곳으로 가는 모스크바 공항에서 파리행 비행기를 놓치고 공항에 오랫동안 갇혀서 이런 개고생 좀 그만하려고 나이가 든 만큼 현명해지려고 했던 것 같은데 집에만 있으려고 했던 것..
2021.02.20 -
양안다 / 진단
양안다 / 진단 토할 때까지 음식을 구겨 넣지 마세요, 술을 줄이세요, 담배를 피웁니까, 가족과는 화목하군요, 애인이 있습니까, 미래에 무엇을 하고 싶습니까, 어때요, 어렵진 않나요, 극단적인가요, 왜 죽고 싶습니까, ……모르겠다고 했어 죽고 싶은지 아닌지도 모르겠는데 이유를 말하라면 더 모르겠고 그걸 확인하려고 그곳에 갔었어 그날은 오래 걸었지 모르는 길을 걸으면 모르는 장소가 생기고 정서가 생기는데 어떤 이름이 붙여야 할까 넌 알아? 멀리 걸어서 먼 곳까지 갔다는 너는 정답을 알아? 나는 종종 공원에 앉아 바닥을 쪼는 새들이 날아오르길 기다린다 일제히 날아오르는 광경, 너와 함께 본다면 좋을 텐데 네가 내 손을 잡던 때를 기억한다 어깨를 감싸고 괜찮아 긴장하지 마, 그런 목소리가..
2020.11.29 -
황인찬 / "내가 사랑한다고 말하면 다들 미안하다고 하더라"
황인찬 / "내가 사랑한다고 말하면 다들 미안하다고 하더라" 공원에 떨어져 있던 사랑의 시체를 나뭇가지로 밀었는데 너무 가벼웠다 어쩌자고 사랑은 여기서 죽나 땅에 묻을 수는 없다 개나 고양이가 파헤쳐버릴 테니까 그냥 날아가면 좋을 텐데,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그날 꿈에는 내가 두고 온 죽은 사랑이 우리 집 앞에 찾아왔다 죽은 사랑은 집 앞을 서성이다 떠나갔다 사랑해, 그런 말을 들으면 책임을 내게 미루는 것 같고 사랑하라, 그런 말은 그저 무책임한데 이런 시에선 시체가 간데온데없이 사라져야 하는 법이다 그러나 다음 날 공원에 다시 가보면 사랑의 시체가 두 눈을 뜨고 움직이고 있다 황인찬 / "내가 사랑한다고 말하면 다들 미안하다고 하더라" (황인찬, 사랑을 위한 ..
2020.02.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