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인(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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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민혁 「23」
우리 좀 이상해, 그치? 내가 미쳐 버린 건지도. 너와 내가 지난날의 우리를 연기하며 살가운 애인인 척하고 있다. 네가 막차 시간을 알아봐 주던 시간에, 이제 나는 느리게 네 야윈 몸을 쓸어 본다. 내가 아끼는 거 알고 있지? 응. 그럼 됐어. 누구나 실감 나는 그리움을 위해 후회할 거리 몇 개쯤 남겨 두는 거다. 박민혁, 대자연과 세계적인 슬픔, 파란, 2021
2021.03.25 -
이응준 「안개와 묘비명과」
무용지물이 되어 버린 추억에게 그 계절들과 그 골목이 있다. 흘러가도 흘러가도 두려운 것은 너를 잃은 내가 고작 나이기 때문이다. 아직 사진이 없었을 적에는 인간의 추억이 이 지경까진 아니었을 텐데 아무리 궁리해 본다 한들 타인보다 낯선 것이 내 뒷모습이다. 묘비명은 단 두 줄. 하루는 지나갔다. 인생은 지루했다. 이응준, 애인, 민음사, 2012
2021.01.04 -
양안다 / 진단
양안다 / 진단 토할 때까지 음식을 구겨 넣지 마세요, 술을 줄이세요, 담배를 피웁니까, 가족과는 화목하군요, 애인이 있습니까, 미래에 무엇을 하고 싶습니까, 어때요, 어렵진 않나요, 극단적인가요, 왜 죽고 싶습니까, ……모르겠다고 했어 죽고 싶은지 아닌지도 모르겠는데 이유를 말하라면 더 모르겠고 그걸 확인하려고 그곳에 갔었어 그날은 오래 걸었지 모르는 길을 걸으면 모르는 장소가 생기고 정서가 생기는데 어떤 이름이 붙여야 할까 넌 알아? 멀리 걸어서 먼 곳까지 갔다는 너는 정답을 알아? 나는 종종 공원에 앉아 바닥을 쪼는 새들이 날아오르길 기다린다 일제히 날아오르는 광경, 너와 함께 본다면 좋을 텐데 네가 내 손을 잡던 때를 기억한다 어깨를 감싸고 괜찮아 긴장하지 마, 그런 목소리가..
2020.11.29 -
최백규 / we all die alone
최백규 / we all die alone 가난한 애인이 장마를 삼켜서 어지러웠다 숲속에서 망가진 나무를 되감을 때마다 세상엔 일기예보가 너무 많고 내가 만든 날씨는 봄을 웃게 할 수도, 떨어뜨릴 수도 없어서 시들겠다는 비근함을 믿고 싶어졌다 마른 손목과 외로운 눈동자도 썩 어울렸다 거룩한 꽃을 오래 밟다가 잠들면 바람이 다 자살할 때까지 망가져 내리는 유성우 내일 밤 현실에 따뜻한 천사를 보면서 그곳이 천국이라 생각할 텐데 지금은 이대로 사라지면 어쩌지 걱정하는 내가 있고 어제 들은 음악과 며칠 전 봤던 영화에서도 사라지면 안 되는 것들만 사라져서 네가 웃을 때마다 누군가와 손잡고 걷는 꿈들을 꿨다 우리는 슬픈 것이 닮았고, 피가 달라서 더 슬프다 죄를 안고 함께 목 놓아 울어줄..
2020.09.15 -
전윤호 / 유실물 보관소
전윤호 / 유실물 보관소 그 이름을 잃어 버렸다 못 잊을 줄 알았는데 전화번호도 생각나지 않는다 우주에 사라지는 건 없어서 여기 아니면 다른 데 나타난다는데 당신은 누구의 뜰에 꽃피었을까 어느 햇볕 어떤 바람에 허리를 살랑이며 웃고 있을까 지붕을 두들기는 소낙비 나는 어디서 잃어버린 누구의 애인일까 전윤호 / 유실물 보관소 (전윤호, 천사들의 나라, 파란, 2016) https://www.instagram.com/donkgrine/
2020.08.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