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음(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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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해욱 / 이렇게 추운 날에
신해욱 / 이렇게 추운 날에 이렇게 추운 날에. 열쇠가 맞지 않는다. 이렇게 추운 날에. 얼굴이 떠오르지 않는다. 뭘까. 이 어리석음은 뭘까. 얼음일까. 얼음의 마음일까. 막연히 문을 당기자 어깨가 빠지고 뼈가 쏟아지고 쏟아진 뼈들이 춤을 출 수 없게 하소서 경건한 노래가 굴러떨어지고 뼈만 남은 이야기에 언젠가 눈이 내리는데 깨진 약속들이 맹목적으로 반짝이게 되는데 일관성을 잃은 믿음과 열쇠와 열쇠 구멍과 이렇게 추운 날에. 너는 있다. 여전히 있다. 터무니없이 약속을 지키고 있다. 아주 다른 것이 되어 이렇게 추운 날에 모든 밤의 바깥에서 신해욱 / 이렇게 추운 날에 (신해욱, 무족영원, 문학과지성사, 2019) https://www.instag..
2020.07.02 -
안도현 / 북항
안도현 / 북항 나는 항구라 하였는데 너는 이별이라 하였다 나는 물메기와 낙지와 전어를 좋아한다 하였는데 너는 폭설과 소주와 수평선을 좋아한다 하였다 나는 부캉, 이라 말했는데 너는 부강, 이라 발음했다 부캉이든 부강이든 그냥 좋아서 북항, 한자로 적어본다, 北港, 처음에 나는 왠지 北이라는 글자에 끌렸다 인생한테 패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어디로든지 쾌히 달아날 수 있을 것 같았다 모든 맹서를 저버릴 수 있을 것 같았다 배신하기 좋은 북항, 불 꺼진 삼십 촉 알전구처럼 어두운 북항, 포구에 어선과 여객선을 골고루 슬어놓은 북항, 이 해안 도시는 따뜻해서 싫어 싫어야 돌아누운 북항, 탕아의 눈 밑의 그늘 같은 북항, 겨울이 파도에 입을 대면 칼날처럼 얼음이 해변의 허리에 백여 빛날 것 같아서 북..
2020.06.30 -
김이듬 / 여기 사람 아니죠
김이듬 / 여기 사람 아니죠 북국 해변 아니다 유럽식 전원주택 거리를 걸어 봤다 그는 말했다 텔레비전에 나왔던 유명한 동네죠, 한끼줍쇼, 그 프로 봤어요? 대뜸 문 두드리는 건 무례한 일 아닌가요? 태곳적에서나 가능했을 일인데 텔레비전도 보며 살아야 대화가 된다고 했다 근처에 푸른 얼음 떠다니는 인공 호수가 있었지만 볼수록 이상하고 염세적인 여자라며 여기서 이만 안녕하자고 했다 더 야위고 더 창백한 여자가 서 있다 이상하게 가게 거울들은 수척히 반영한다 어디서 왔어요? 외투를 벗으라 하며 미용사가 물었다 외국에서 자주 듣던 말에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우물쭈물하는데 머리를 자르면 긴 얼굴이 더 길어 보일 거라고 했다 사투리를 쓰면 웃는 사람이 많다 진주 가는 건데, 꼭 지방 내..
2020.06.25 -
서대경 / 벽장 속의 연서
서대경 / 벽장 속의 연서 요 며칠 인적 드문 날들 계속되었습니다 골목은 고요하고 한없이 맑고 찬 갈림길이 이리저리 파여 있습니다 나는 오랫동안 걷다가 지치면 문득 서서 당신의 침묵을 듣습니다 그것은 당신이 내게 남긴 유일한 흔적입니다 병을 앓고 난 뒤의 무한한 시야, 이마가 마르는 소리를 들으며 깊이 깊이 파인 두 눈을 들면 허공으로 한줄기 비행운(飛行雲)이 그어져갑니다 사방으로 바람이 걸어옵니다 아아 당신, 길들이 저마다 아득한 얼음 냄새를 풍기기 시작합니다 서대경 / 벽장 속의 연서 (서대경, 백치는 대기를 느낀다, 문학동네, 2012) https://www.instagram.com/donkgrine/
2020.05.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