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우(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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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대경 / 여우계단
서대경 / 여우계단 여우계단 꿈에서 밝은 허공을 만나고 돌아오는 길에는 잿빛의 높은 담벽들이 골목 양편으로 끝없이 뻗어나갑니다 하수구에서 올라온 검은 쥐들이 일렬로 벽 위를 기어갑니다 나는 담벽에 매달려 저편에 서 있는 못 보던 공장들과 못 보던 아버지들을 봅니다 공장 굴뚝에서 검은 연기가 피어오릅니다 아버지는 목장갑을 벗고 철근 더미 위에 앉아 담배를 뭅니다 공장 앞으로 흑백의 강이 흘러갑니다 아버지 곁에 누워 있던 개들이 일제히 송곳니를 드러내며 이쪽을 향해 짖어댑니다 나는 조금 걸음을 빨리합니다 계단을 올라가는데 어릴 적 동화에서 보았던 작은 여우가 보였습니다 여우는 계단 한쪽 구석에서 빙빙 맴을 돕니다 잔뜩 찌푸린 하늘 아래서 여우는 은은히 빛납니다 속삭임이 퍼지고 여우의 율동이 밝..
2020.11.29 -
안도현 / 만두집
안도현 / 만두집 세상 가득 은행잎이 흐득흐득 지고 있었다 고등학교 시절 늦가을이었다 교복을 만두속같이 가방에 쑤셔넣고 까까머리 나는 너를 보고 싶었다 하얀 김이 왈칵 안경을 감싸는 만두집에 그날도 너는 앉아 있었다 통만두가 나올 때까지 주머니 속 가랑잎 같은 동전을 만지작거리며 나는 무슨 대륙 냄새가 나는 차를 몇 잔이고 마셨다 가슴을 적시는 뜨거운 그 무엇이 나를 지나가고 잔을 비울 때마다 배꼽 큰 주전자를 힘겹게 들고 오던 수학 시간에 공책에 수없이 그린 너의 얼굴은 아무 말이 없었다 귀밑에 밤알만한 검은 점이 있는 만두집 아저씨 중국 사람과 웃으면 덧니가 처녀 같은 만두집 아줌마 조선 사람 사이에 태어난 화교학교에 다닌다는 그 딸 너는 계산대 앞에 여우같이 앉아 있었다 한 번도 ..
2020.03.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