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은(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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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은 / 이국적 감정
오은 / 이국적 감정 자고 났더니 눈에 쌍까풀이 생겼다 자, 누구한테 고백해야 할까 너는 섣불리 국경을 넘어 내 품에 파고든다 키스하기 싫은데 너의 입에 어떤 색깔의 재갈을 물릴 것인가 척골처럼 부서져버릴까 꽃병처럼 깨져버릴까 너와 나의 의견처럼 산산이 조각나 다시는 붙지 못해버릴까 너무 익은 토마토처럼 금이 가버렸는데, 결승점 금은 대체 어디에 그어졌는가 나는 불쌍한 표정을 짓고 버전을 달리하며 달리기 시작한다 15페니를 쥔 소년과 300원을 쥔 소녀 중 누가 더 불쌍합니까 우리는 서로 다른 쪽에 표를 던진다 TV 속에서는 총격적인 한창인데 아무 일도 없다는 듯 덮밥을 퍼먹는 게 가능합니까 나는 숟가락을 놓고 재갈을 문 너의 입은 게걸스럽다 선생님, 쟤와 ..
2020.12.02 -
오은 / 내일의 요리
오은 / 내일의 요리 내일은 언제나 배가 고픕니다 식욕이 베이킹파우더처럼 부풀어 오릅니다 모레를 위해서라도 사방에 소금을 뿌려야 합니다 뒷맛이 씁니다 오늘은 밥을 먹습니다 마음이 글루텐처럼 죽죽 늘어납니다 피부에 윤기가 자르르 흐릅니다 너를 생각하느라 첫맛을 느낄 겨를이 없습니다 어제는 쌀을 씻었습니다 신경을 쓰고 주의를 기울였습니다 하나의 명사를 위해 너무 많은 동사들을 소모했습니다 편지를 쓰고 해가 기울었는데도 아무도 오지 않았습니다 양 볼에 눈물이 주르르 흘렀습니다 너를 생각하느라 밥은 끓기도 전에 식을 준비를 하고 있었습니다 오은 / 내일의 요리 (오은, 유에서 유, 문학과지성사, 2016) https://www.instagram.com/donkgrine/
2020.08.23 -
오은 / 아이디어
오은 / 아이디어 한 줄기 빛은 한 줄기 빛 발아가 이루어지면 한 포기 난초와 한 떨기 장미로 피어난다 우리는 분위기를 사랑해 엄습하는 것들을 사랑해 때때로 우리가 직접 나서서 그것들을 잡기도 하지 커피의 김과 담배 연기가 모락모락 피어오르면 커서는 껌벅거리며 최면을 걸고 은밀하게 시작되는 한낮의 점성술 우리는 별처럼 빛나는 순간을 기다려 우리의 동공이, 우리의 동맥이 현장을 사로잡는 순간을 기다려 때때로 빛이 너무 커다래서 우리는 터질 듯 벅차올라 땅에 꽂히는 일도 있겠지 바르르 파르르 눈꺼풀을 떨며 마지막 남은 한 줄기 빛을 울컥 토해내겠지 한 줄기 빛은 한 줄기 빛 땅 위로 봉긋 더욱 또렷하고 아름답게 피어나 원음보다 선명한 메아리처럼 우리는 분위기를 장악..
2020.03.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