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투(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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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리 「코러스」
너는 점심시간만 되면 식당에 가는 대신 빈 교실에 남아 도시락을 먹었고 나처럼 매일같이 도서관에 조용히 앉아 있다가 갔다 그리고 너는 내가 걸어 둔 외투에 항상 자신의 외투를 겹처 걸어 두었다 책을 읽다가 문득 고개를 들면 너는 엽서만 한 수첩에 무엇인가를 적고 있었다 창밖에서 들려오는 웃음소리들이 책장을 넘기는 사이사이에 눈송이처럼 떨어져 녹아내리기도 했다 그럴 때면 읽던 책을 잠시 시옷자로 덮어 두고 옷을 챙기고 나가 운동장 주변을 좀 걷다 들어올까 싶다가도 나의 외투를 뒤에서 끌어안고 있는 너의 외투를 바라보고 나면 그 자리에서 책을 단숨에 다 읽었다 전화를 받으려고 황급히 나가는 네 뒷모습을 하염없이 쳐다보고 두고 간 수첩을 집어 들었다가 가만히 내려놓았다 수선스러웠던 복..
2021.02.10 -
이혜미 / 습기의 나날
이혜미 / 습기의 나날 손끝마다 안개를 심어둔 저녁에는 익사한 사람의 발을 만지는 심정으로 창을 열었다 젖은 솜으로 기운 외투를 덮고 잠드는 나날이었다 몸 안의 물기를 모두 공중으로 흩뿌리고서야 닿을 수 있는 탁한 피의 거처가 있다 내 속을 헤엄치던 이는 순간의 바다로 흘러갔다 젖어들고 나서야 문장의 끝이 만져지는 기이한 세계 굳어버린 혀에 안개가 서리면 입속은 수레국화를 머금은 듯 자욱해진다 어깨를 털어내는 새의 깃털 속에서 계절은 문득 오랜 미신이 되었다 이혜미 / 습기의 나날 (이혜미, 뜻밖의 바닐라, 문학과지성사, 2016) https://www.instagram.com/donkgrine/
2020.11.28 -
김이듬 / 여기 사람 아니죠
김이듬 / 여기 사람 아니죠 북국 해변 아니다 유럽식 전원주택 거리를 걸어 봤다 그는 말했다 텔레비전에 나왔던 유명한 동네죠, 한끼줍쇼, 그 프로 봤어요? 대뜸 문 두드리는 건 무례한 일 아닌가요? 태곳적에서나 가능했을 일인데 텔레비전도 보며 살아야 대화가 된다고 했다 근처에 푸른 얼음 떠다니는 인공 호수가 있었지만 볼수록 이상하고 염세적인 여자라며 여기서 이만 안녕하자고 했다 더 야위고 더 창백한 여자가 서 있다 이상하게 가게 거울들은 수척히 반영한다 어디서 왔어요? 외투를 벗으라 하며 미용사가 물었다 외국에서 자주 듣던 말에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우물쭈물하는데 머리를 자르면 긴 얼굴이 더 길어 보일 거라고 했다 사투리를 쓰면 웃는 사람이 많다 진주 가는 건데, 꼭 지방 내..
2020.06.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