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국(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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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혜미 / 뜻밖의 바닐라
이혜미 / 뜻밖의 바닐라 귓바퀴를 타고 부드럽게 미끄러졌지. 미묘한 요철을 따라 흐르는, 그런 혀끝의 바닐라. 수없이 많은 씨앗들을 그러모으며 가장 보편적인 표정을 지니려. 두근거리며 이국의 이름을 외웠지. 그건 달콤에 대한 첫번째 감각. 사라지는 것들에 대한 각별한 취향. 녹아내리는 손과 무릎이 있었지. 차갑고 뜨겁게 흐르는, 접촉이 서로를 빚어낼 때. 소리의 영토 안에서 나는 세로로 누운 꽃. 손끝에서 점차 태어나. 닿아 녹으며 섞이는, 품이라는 말. 그런 바닐라. 적당한 점도의 안구를 지니려. 모르는 사람을 나는 가장 사랑하지. 잃어버리는 순간 온전해지는 눈꺼풀이 있었다. 순한 촉수를 흔들며 미끄러지다 흠뻑 쓰러지는. 이혜미 / 뜻밖의 바닐라 (이혜미, 뜻밖의 바닐라, 문학과지..
2020.11.28 -
이바라기 노리코(茨木のりこ) / 내가 가장 예뻤을 때
이바라기 노리코(茨木のりこ) / 내가 가장 예뻤을 때 내가 가장 예뻤을 때 거리마다 와르르 무너져 내려 엉뚱한 곳에서 푸른 하늘 같은 것이 보이기도 했다 내가 가장 예뻤을 때 곁에 있던 이들이 숱하게 죽었다 공장에서 바다에서 이름 모를 섬에서 나는 멋 부릴 기회를 잃어버렸다 내가 가장 예뻤을 때 아무도 다정한 선물을 주지 않았다 남자들은 거수경례밖에 할 줄 몰랐고 순진한 눈빛만을 남긴 채 모두 떠나갔다 내가 가장 예뻤을 때 나의 머리는 텅 비고 나의 마음은 꽉 막혀 손발만이 짙은 갈색으로 빛났다 내가 가장 예뻤을 때 나의 나라는 전쟁에서 졌다 그런 멍청한 짓이 또 있을까 블라우스 소매를 걷어붙이고 비굴한 거리를 마구 걸었다 내가 가장 예뻤을 때 라디오에선 재즈가 흘러나왔다 금..
2020.02.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