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마(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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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우신 「리플리컨트 노트」
다음번 잠은 깔끔하게 넘어갔으면 좋겠다 나는 왜 자꾸 눕지 스르륵 날리지 허리에 흰 천을 감고 내려앉고 싶다 온도가 달라지는 빛을 겪으면서 조금 더 자라고 싶다 바람의 방향에 따라 손의 모양이 달라진다 투명에 가까워진다 생아편이 들어 있는 식물을 가꿀 시간은 없겠지 아늑하고 느리게 이빨을 뽑고 아가미를 달 것이다 낯선 숨을 머금고 너의 꿈속으로 불쑥 찾아갈 것이다 알약을 모으고 신발을 정리했어요 바람이 기다란 머리카락을 갖고 싶다고 말했어요 어떻게 하면 당신이 나를 자주 떠올릴 수 있을지 나를 걱정해주던 그 눈빛으로 내 이마를 쓸어준다면 좋을 텐데 아주 깊은 잠에 빠질 텐데 깨어날 때마다 사라지는 등 평생 불안에 떨며 뛰어다니던 영양은 어느 날 무리에서 이탈하기로 작정했다 내심 ..
2021.01.01 -
최백규 / 낙원
최백규 / 낙원 그해 봄은 성한 곳 없이 열을 앓았다 살을 맞대어 서로에게 병을 안겨주던 시절이었다 눈더미처럼 누워 화관을 엮었다 불 지르고 비가 쏟아지는 날에도 창을 열어두고 살았다 보낸 적도 없는데 돌아오지 않는 일이 있어서 문턱을 쓸듯이 늦은 저녁을 차리며 끓어 넘치지 않도록 들여다보는 사이 과일은 무르고 이마가 식지 않았다 최백규 / 낙원 (창작동인 뿔, 한 줄도 너를 잊지 못했다, 아침달, 2019) https://www.instagram.com/donkgrine/
2020.09.15 -
신미나 / 이마
신미나 / 이마 장판에 손톱으로 꾹 눌러놓은 자국 같은 게 마음이라면 거기 들어가 눕고 싶었다 요를 덮고 한 사흘만 조용히 앓다가 밥물이 알맞나 손등으로 물금을 재러 일어나서 부엌으로 신미나 / 이마 (신미나, 싱고, 라고 불렀다, 창비, 2014) https://www.instagram.com/donkgrine/
2020.08.05 -
안희연 / 물속 수도원
안희연 / 물속 수도원 기도는 기도라고 생각하는 순간 흩어진다 나는 물가에 앉아 짐승이라는 말을 오래 생각했는데 저녁은 죽은 개를 끌고 물속으로 사라지고 목줄에는 그림자만 묶여 있다 개보다 더 개인 것처럼 묶여 있다 그림자의 목덜미를 만지며 물속을 본다 걸음을 재촉하는 사람들 그 끝엔 낮은 입구를 가진 집 물의 핏줄 같은 골목을 따라 모두들 한곳으로 가고 있다 마음껏 타오르는 색들, 오로라, 죽은 개 나는 그림자에 대고 너는 죽은 것이라고 말한다 물 위에 드리워진 나뭇가지 얼굴은 수초로 가득한 어항 같아 나는 땅에 작은 집을 그리고 그 안에 말없이 누워본다 이마를 짚으면 이마가 거기 있듯이 이마를 짚지 않아도 이마가 거기 있듯이 안희연 / 물속 수도원 (안희연, 너..
2020.06.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