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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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다연 「월화수목금토일」
잘 지내? 누가 묻지도 않았는데 잘 지내 답하고 싶은 순간이 있습니다 오늘은 당신에 대해 참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당신이 좋아하던 음식을 올려놓고 기름기 묻은 손을 세제로 씻으며 물기를 닦던 사소한 습관과 벨을 누르면 가장 먼저 반겨주던 당신에 대해 수화기 너머로 들려오던 음성에 대해 - 잘 지내고 있어? 벽장에 비치는 것이라곤 그림자 하나뿐인데 문득 묻고 싶은 순간이 있습니다 비를 모으고 모으다 못 견디고 무너지는 댐처럼 폭설에 쓰러지는 나무처럼 어떻게 지내 묻고 싶은 순간이 - 오늘은 당신에 대해 이야기를 참 많이 나누었습니다 당신이 좋아하지 않던 음식을 앞에 두고 왜 싫어했을까? 이렇게 먹기 좋은 것을 웃으면서 월화수목금토..
2021.11.07 -
유진목 「만리」
그는 바다에 나갔다가 한참 키가 자라는 아이처럼 돌아오곤 했다. 분명한 나의 아이처럼 이제 더는 품을 수 없는 품에 안고 만질 수 없는 물에 오르자 장성한 사내가 되고 여기서 우리의 이야기는 잠시 멈춘다. 나는 젊은 여자의 몸으로 일어난다. 그는 숨을 참고 더 먼바다로 가고 싶다. 금방 돌아오겠다는 말을 하고서 우리는 오랫동안 살아왔다. 유진목, 작가의 탄생, 민음사, 2020
2021.01.13 -
손택수 / 날씨 없는 날씨
손택수 / 날씨 없는 날씨 일기예보를 보고 내일의 의상을 결정한다 내 사회성의 구 할 역시 날씨로부터 온다 날씨가 없었다면 내 어눌한 관계들은 다 파국을 맞고 말았을 터,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묻는 말도 취침 전의 관심사도 틀림없는 날씨 이야기다 캘리포니아 해변에 사는 제자가 보내온 이메일도 날씨로부터 시작한다 날씨는 만국공통어, 나이가 들면서 대기의 흐름에 예민해진다 정작 하늘 한번 본 적이 없이 하루를 마감하면서도 흐리면 흐린 대로, 맑으면 맑은 대로 몸과 맘도 함께 반응을 한다 일기예보를 빠짐없이 살피면서 나는 늙어가나 보다 감기 걱정을 하고 미세먼지 마스크를 준비하면서 비가 오면 비가 오는 대로 빗속을 빗줄기처럼 뛰어다니고 눈이 오면 눈이 오는 대로 눈사람을 만들 줄 아는 아이들을 부러워..
2020.04.30 -
주하림 / 작별
주하림 / 작별 혐오라는 말을 붙여줄까 늘 죽을 궁리만 하던 여름날 머리를 감겨주고 등 때도 밀어주며 장화를 신고 함께 걷던 애인조차 떠났을 때 나는 사라지기 위해 살았다 발 아픈 나의 애견이 피 묻은 붕대를 물어뜯으며 운다 그리고 몸의 상처를 확인하고 있는 내게 저벅저벅 다가와 간신히 쓰러지고는, 그런 이야기를 사람의 입을 벌려 말할 것만 같다 '세상의 어떤 발소리도 너는 닮지 못할 것이다' 네가 너는 아직도 어렵다는 얘기를 꺼냈을 때 나는 우리가 한번이라도 어렵지 않은 적이 있냐고 되물었다 사랑이 힘이 되지 않던 시절 길고 어두운 복도 우리를 찢고 나온 슬픈 광대들이 난간에서 떨어지고, 떨어져 살점으로 흩어지는 동안 그러나 너는 이상하게 내가 손을 넣고 살며시 기댄 사람이었다 주하..
2020.02.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