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김(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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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수우 「아무도 등장하지 않는 이 거울이 마음에 든다」
한 사람에게 가장 먼 곳은 자신의 뒷모습이었네 그는 그 먼 곳을 안으러 간다고 했다 절뚝이며 그가 사라진 거울 속에서 내가 방을 돌보는 동안 거실의 소란이 문틈을 흔든다 본드로 붙여둔 유리잔 손잡이처럼 들킬까 봐 자꾸만 귀가 자랐다 문밖이 가둔 이불 속에서 나는 한쪽 다리로 풍경을 옮기는 사람을 본다 이곳이 아니길 이곳이 아닌 나머지이길 중얼거릴수록 그가 흐릿해졌다 이마를 기억한 손이 거울 끝까지 굴러가 있었다 거실의 빛이 문틈을 가를 때 그는 이 방을 겨눌 것이다 번쩍이는 총구를 지구 끝까지 늘리며 제 뒤통수를 겨냥한다 해도 누구의 탓은 아니지 거울에 남은 손자국을 따라 짚으며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내게 뒷모습을 안겨주던 날 모서리가 처음 삼킨 태양을 생각했다 흉터를 ..
2022.01.14 -
박세랑 「누가 너를 이토록 잘라 놓았니」
응급실에서 눈을 뜬 아침, 절망이 동공을 힘껏 긋고 지나가는데 등이 구부정한 아버지가 곧 사라질 것처럼 희미한 표정으로 내 곁에 앉아 있다 얘야 무엇이 왜 이토록… 너를 고통스럽게 만들었니 병실 침대 맡에서 아버지의 눈빛이 흐릿하게 묻고 있다 아버지 달이 자꾸만 커지는 게 무서워서요 새벽녘에 커다란 보름달이 목을 졸라댔거든요 자세히 보니 달은 창백하게 얼어붙은 내 과거의 눈동자였어요 그걸 쳐다보고 있자니 동공이 깨질 듯이 쓰라려서요 싸늘하게 겪은 일과 시퍼렇게 당한 일 사이에 걸터앉아서 손목을 사각사각 깎아냈을 뿐인걸요 연필 가루처럼 후두둑 떨어지던 피가 어느새 통통한 벌레로 변하더니 바닥을 기어 다니던데요 말할 수 없는 고통을 기어이 발설하기 위해서 뾰족하게 깎아지른 손목으로 나는 또박또박 상처..
2021.09.05 -
안희연 / 12월
안희연 / 12월 겨울은 빈혈의 시간 피주머니를 가득 매단 크리스마스트리 같은 것만 생각나 입김 한 번에 허물어지는 사람들이 이곳엔 너무너무 많다 너무라고 말하지 않고 너무너무라고 말하는 것 그래도 겨울은 눈 하나 끔뻑하지 않겠지 그래서 당신은 무엇으로 살아가는 사람입니까 강도를 높여가는 겨울의 질문 앞에서 나는 나날이 창백해진다 이렇게 텅 빈 마음으로 살아가도 괜찮을 걸까 기도가 기도를 밟고 오르는 세상에서 헐렁헐렁 산책하는 일 검은 비닐봉지에 담긴 축축한 영혼을 나라고 부르는 일 다행히 겨울은 불을 피우기 좋은 계절이다 나에겐 태울 것이 아주 많고 재가 될 때까지 들여다볼 것이 있어서 좋다 "잘하고 못하는 게 어디 있어, 그냥 사는 거지" 불 앞에서 다 식은 진..
2020.07.05 -
박성우 / 목도리
박성우 / 목도리 뜨개질 목도리를 하고 가만히 앉아 있으면 왠지 애인이 등 뒤에서 내 목을 감아올 것만 같아 생각이 깊어지면,애인은 어느새 내 등을 안고 있다 가늘고 긴 팔을 뻗어 내 목을 감고는 얼굴을 비벼온다 사랑해, 가늘고 낮은 목소리로 귓불에 입김을 불어넣어온다 그러면 나는 그녀가 졸린 눈을 비비며 뜨개질했을 밤들을 생각한다 일터에서 몰래 뜨다가 걸려 혼줄이 났다는 말을 떠올리며 뭐 하러 그렇게까지 해 그냥 하나 사면 될걸 가지구,라고 나는 혼잣말을 한다 그러다가는 내 목에 감겨 있는 목도리는 헤어진 그녀가 내게 마지막으로 선물한 것이라는 것에서 생각을 멈춘다 애인도 손을 풀고는 사라진다 박성우 / 목도리 (박성우, 가뜬한 잠, 창비, 2019) https://www.instagram...
2020.02.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