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녁(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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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해주 「여분」
저녁 먹었어요? 어떤 사람이 그렇게 물어오면 일부러 저녁을 먹지 않는다. 먹지 않았다고 말하려고. 약속 장소에 도착하기 전에 드라마를 본다. 행복해지거나 죽기 직전까지의 이야기. 뉴스를 본다. 신발을 훔치다가 사람을 찌른 적이 있다고 말하려고. 구태여 그것을 전부 이야기하지 않아도 나는 어떤 사람과 저녁에 만난다. 함께 아파트 단지 앞을 지나가는 중이고 길옆으로 검푸른 화단이 계속되고 있다. 나는 어떤 사람보다 조금 앞서 걸으면서 화단의 나뭇잎을 잡아 뜯는다. 단지 셔츠의 색깔에 대해서 기억하지 않으려고 하는 행동인데 그는 흩어진 나뭇잎 몇 장을 밟으면서 사뿐히 뒤따라온다. 어디 아파요? 어떤 사람이 나의 안색을 살피면 아프지 않다. 혼자 있을 때 마음껏 아프려고. 시..
2021.04.16 -
허수경 / 냉동 새우
허수경 / 냉동 새우 이 굽은 얼음덩어리를 녹이려고 물을 붓고 기다렸다 몸통은 녹아가도 굽은 허리는 펴지지 않았다 피곤, 이라는 말이 떠올랐다 아물어지지 않은 피곤의 흔적이라는 헤아릴 수 없음도 녹은 새우를 어루만졌다 말랑말랑하구나, 네 몸은 이루어질 수 없는 평화 같은 미지근한 바다가 손가락 사이에서 빠져나갔다 꿈에서 돌아오듯 나는 시를 쓰는 것을 멈추었고 이제 시 아닌 다른 겹의 시간에게 마른 미역 봉지를 건네주었다 새우는 다시 얼음으로 돌아가고 싶다는 듯 저녁을 향하여 무심히 죽어 있었네 제 살던 곳에서 끌려나와 동유럽 겨울 눈 속에서 구부리고 맨땅에서 국을 떠먹던 난민처럼 내일 새벽 일찍 나가 눈길을 걸어 밥을 벌어야 하는 발처럼 허수경 / 냉동 새우 (허수경, 가기 ..
2020.04.30 -
한강 / 거울 저편의 겨울 5
한강 / 거울 저편의 겨울 5 시계를 다시 맞추지 않아도 된다, 시차는 열두 시간 아침 여덟 시 덜덜덜 가방을 끌고 입원 가방도 퇴원 가방도 아닌 가방을 끌고 핏자국 없이 흉터도 없이 덜컥거리며 저녁의 뒷면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한강 / 거울 저편의 겨울 5 (한강, 서랍에 저녁을 넣어 두었다, 문학과지성사, 2013) https://www.instagram.com/donkgrine/
2020.03.04 -
안도현 / 스며드는 것
안도현 / 스며드는 것 꽃게가 간장 속에 반쯤 몸을 담그고 엎드려 있다 등판에 간장이 울컥울컥 쏟아질 때 꽃게는 뱃속의 알을 껴안으려고 꿈틀거리다가 더 낮게 더 바닥 쪽으로 웅크렸으리라 버둥거렸으리라 버둥거리다가 어찌할 수 없어서 살 속으로 스며드는 것을 한때의 어스름을 꽃게는 천천히 받아들였으리라 껍질이 먹먹해지기 전에 가만히 알들에게 말했으리라 저녁이야 불 끄고 잘 시간이야 안도현 / 스며드는 것 (안도현, 간절하게 참 철없이, 창비, 2008) https://www.instagram.com/donkgrine/
2020.02.27 -
이상국 / 상강(霜降)
이상국 / 상강(霜降) 나이 들어 혼자 사는 남자처럼 생각이 아궁이 같은 저녁 누구를 제대로 사랑한단 말도 못했는데 어느새 가을이 기울어서 나는 자꾸 섶이 죽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상국 / 상강(霜降) (이상국, 뿔을 적시며, 창비, 2012) https://www.instagram.com/donkgrine/
2020.02.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