짐승(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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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륭 / 샤워
김륭 / 샤워 열대식물을 생각했다. 당신은 마음에 손잡이가 달려 있다고 했다. 당신이 아름다워 보였지만 내가 아름다워지는 건 아니었다. 털이 북슬북슬한 몸으로 마음까지 걸어 들어갈 궁리를 하다 보면 사막과 친해졌다. 짐승이란 말을 들었다. 나는 손잡이가 몸에 달려 있었고 사막여우 같은 당신의 마음이 걸어 다니기엔 더없이 좋아 보였다. 그때부터였다. 사는 게 말이 아니었다. 벌레잡이통풀, 끈끈이주걱, 파리지옥…… 사랑은 어디에 달려 있던 손잡이일까, 하고 궁금해졌다. 당신의 울음에 기여한 문장들로 샤워를 하면서 열대식물을 생각했다. 아무래도 당신을 너무 착하게 살았다. 나는 꽤나 괜찮은 짐승이고 그래서 쫓겨난다고 생각했다. 김륭 / 샤워 (김륭, 원숭이의 원숭이, 문..
2020.07.29 -
안희연 / 물속 수도원
안희연 / 물속 수도원 기도는 기도라고 생각하는 순간 흩어진다 나는 물가에 앉아 짐승이라는 말을 오래 생각했는데 저녁은 죽은 개를 끌고 물속으로 사라지고 목줄에는 그림자만 묶여 있다 개보다 더 개인 것처럼 묶여 있다 그림자의 목덜미를 만지며 물속을 본다 걸음을 재촉하는 사람들 그 끝엔 낮은 입구를 가진 집 물의 핏줄 같은 골목을 따라 모두들 한곳으로 가고 있다 마음껏 타오르는 색들, 오로라, 죽은 개 나는 그림자에 대고 너는 죽은 것이라고 말한다 물 위에 드리워진 나뭇가지 얼굴은 수초로 가득한 어항 같아 나는 땅에 작은 집을 그리고 그 안에 말없이 누워본다 이마를 짚으면 이마가 거기 있듯이 이마를 짚지 않아도 이마가 거기 있듯이 안희연 / 물속 수도원 (안희연, 너..
2020.06.16 -
이홍섭 / 터미널
이홍섭 / 터미널 젊은 아버지는 어린 자식을 버스 앞에 세워놓고는 어디론가 사라지시곤 했다 강원도하고도 벽지로 가는 버스는 하루 한 번뿐인데 아버지는 늘 버스가 시동을 걸 때쯤 나타나시곤 했다 늙으신 아버지를 모시고 서울대병원으로 검진받으러 가는 길 버스 앞에 아버지를 세워놓고는 어디 가시지 말라고, 꼭 이 자리에서 서 계시라고 당부한다 커피 한 잔 마시고, 담배 한 대 피우고 벌써 버스에 오르셨겠지 하고 돌아왔는데 아버지는 그 자리에 꼭 서 계신다 어느새 이 짐승 같은 터미널에서 아버지가 가장 어리셨다 이홍섭 / 터미널 (이홍섭, 터미널, 문학동네, 2011) https://www.instagram.com/donkgrine/
2020.02.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