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문(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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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하림 「언덕 없는 이별」
우리는 도서관 통로에서 깊은 키스를 나누었다 어떤 영혼이 지나온 길고 무거운 한숨 죽음의 섬이라는 제목의 스위스 화가 그림이 걸려 있다 키스를 나눈 도서관 창문으로 벚나무 가지들이 들어왔고 마침 깨어난 개구리가 아무도 없는 밤의 연못을 헤맨다 우리는 그때까지 어떤 것으로도 다시 만날 수 있다 나는 그때 조용한 가축들의 울음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너의 마른 등 뒤로 십일 번 트랙을 들려주었고 너를 만났을 때 비로소 그 연주자의 긴 이름을 다 외울 수 있었다 그때 시간은 구소련 음악가들의 무대처럼 춥고 넘쳤지만 세상의 이목을 피해 천사가 연주하던 곡은 실은 신의 조롱으로라도 다시 만나고 싶었던 그대 연주가 끝나기 무섭게 나의 얼굴은 일그러지고 화면 속에 너는 흑백으로 죽어간다 우리는 침묵을 깨는 입맞춤* 사라..
2021.02.24 -
최현우 / 오늘
최현우 / 오늘 물을 붓고 자라는 일들을 지켜본다 대기에 비린 냄새 섞일 때 내가 잘라버린 너를 생각한다 이제 사라져도 좋을, 나도 떠나고 너도 떠난 우리의 지난 일들이 녹고 부풀 때 우리는 꿈결 속에서 장미보다 가시로 자라길 원한다 덜컥 걸린 눈물과 비명이 살인을 닮을 때 우리가 하는 일을 철 지난 노래라 하자 잊기 위해 두고 왔는데 두고 와서 잊을 수 없게 된, 거기서, 우리의 모든 창문을 타고 또다시 미끄러져내려올 때 그게 너와 나의 한때, 소나기라고 하자 그리하여 이곳이다 네가 너를 버린 실종의 곳간에서 잃어버린 것들을 다시 잃어버리는 소음을 들으며 여전히 숨어 잠이 드는 최현우 / 오늘 (최현우, 사람은 왜 만질 수 없는 날씨를 살게 되나요, 문학동네, 2020) https://www.insta..
2020.12.05 -
최지인 / 죄책감
최지인 / 죄책감 너와 손잡고 누워 있을 때 나는 창문에서 뛰어내리는 한 사람을 떠올렸다 이 세계의 끝은 어디일까 수면 위로 물고기가 뛰어올랐다 빛바랜 벽지를 뜯어내면 더 빛바랜 벽지가 있었다 선미船尾에 선 네가 사라질까 봐 두 손을 크게 흔들었다 컹컹 짖는 개를 잠들 때까지 쓰다듬고 종이 상자에서 곰팡이 핀 귤을 골라내며 나는 나를 미워하지 않는다 기도했었다 고요했다 태풍이 온다던데 아무런 진전이 없었다 최지인 / 죄책감 (창작동인 뿔, 한 줄도 너를 잊지 못했다, 아침달, 2019) https://www.instagram.com/donkgrine/
2020.11.18 -
김중일 / 물고기와 산다는 것
김중일 / 물고기와 산다는 것 물고기와 산다는 것에 대해 말하는 상처투성이 한 아이의 두 눈에서 물고기가 뚝뚝 떨어졌다. 물고기를 주워 불에 구웠다. 두툼하고 부드러운 하얀 살을 뜯으며 배를 채웠다. 아이를 잃고 산다는 것에 대해 말하는 한 엄마의 두 눈에서 한 세상이 전봇대보다 길게 뚝뚝 떨어졌다. 떨어진 세상의 표면에 달라붙은 창문이 젖은 물고기 비늘처럼 반짝였다. 떨어지 물고기처럼 세상을 주워, 밤의 창문으로 긁어내고 불에 구웠다. 그을린 세상으로 배를 채우고 뼈만 앙상한 세상을 깊은 밤에 풀어놓았다. 온종일 슬픔을 집어먹고 저녁이면 다시 살이 꽉 차오를 것이다. 아침에 문밖으로 나가려는데 신발 속에 가시처럼 뼈만 남은 물고기가 누워 있다. 김중일 / 물고기와 산다는 것 (김중일, 가슴에..
2020.08.24 -
이용임 / 연애의 시간
이용임 / 연애의 시간 창문이 흰 계절이 온다 몸을 열자 동백나무 우거진 숲 당신이라는 검푸른 관자놀이를 통과하는 한 발의 총성 산산히 깨진 당신을 밟고 맨발로 당신이라는 시간을 걷는다 땀구멍마다 침투하는 당신의 쇳소리가 밤마다 내 몸을 흔든다 모가지째 뚝뚝 당신이 순교한다 나는 가장 벙글지 않은 당신을 주워 탁자 위 꽃병에 꽂는다 이미 죽은 당신의 입술이 벌어지며 그윽한 향기가 흘러나온다 시시각각 피어나며 시드는 당신이라는, 붉은, 짙은, 어지러운, 너덜너덜한 꿈의 자락을 들어 냄새를 맡으면 곧 자욱한 눈보라 으스스한 핏빛 잎들이 한꺼번에 떨어지는 계절 창문이 흰 계절 위에 손가락으로 당신을 쓴다 가장자리부터 얼어붙는 이름을 쓴다 이용임 / 연애의 시간 (이용임, 안개주의보, 문학과지성사, ..
2020.08.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