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사랑과O(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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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연준 「완전하지 않은 것들이 달리는 고속도로」
당신 다리를 주워요 당신 수염을 주워요 벗어진 머리와 낡은 얼굴을 입술의 움직임과 침의 싱싱함을 당신의 모든 말과 글에서 진리에 앞선 홀림, 이 과도한 사랑 빛은 흔들리고 부서질 때 아름다움을 모든 치유의 열쇠는 사랑임을 주워요, 당신의 종이 위에서 당신은 미치광이 흔들리는 심장 수줍은 근육 슬픈 주기율표 발정 난 연필 푸른 늑대 부러진 화살 상처받은 봄과 겨울 완전하지 않은 것들이 질주하는 고속도로에서 누군가 기다린다면, 절뚝이는 사람 곁에서 함께 절뚝이고 있다면 당신은 인생을 다 사용하고 책 속으로 사라진 사람 그늘에서, 당신 영혼을 주워요 고맙습니다 김현 외, 첫사랑과 O, 알마, 2019
2021.03.21 -
안희연 「설경」
다 망가져버렸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어 눈이나 펑펑 와버렸으면 지나고 보니 모든 게 엉망이어서 개들이라도 천방지축 환하게 뛰어다닐 수 있게 새하얀 눈밭이었으면, 했지 그래서 그리기 시작했다네, 눈에 파묻힌 집 눈만 마주쳐도 웃음을 터뜨리던 두 사람이 이제 더 이상 살지 않는 집 깨진 계란껍질 같던 마음도 같이 파묻었지 캔버스 앞으로 모여드는 사람이 많았다 아무도 밟지 않은 흰 눈에는 그런 힘이 있으니까 곰은 곰의 발자국을 찍고 가고 바람은 바람의 발자국을 찍고 가고 모두들 자기 발자국을 들여다보기에 바빴다 그 집은 악몽으로 가득 차 있다고 소리쳐도 아무도 믿지 않았다 지붕까지 파묻힌 집이 어떻게 공포스럽지 않은 거야? 내게는 모든 게 엉망이었던 시간인데 사랑과 낮잠은 참 닮은 구석이..
2021.03.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