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일표(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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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일표 / 북극 거미
홍일표 / 북극 거미 사과가 붉은 것은 햇볕의 농담이라고 말하는 순간 내 손은 순록의 뿔이 된다 다 안다는 듯 아이가 물방울처럼 웃는다 전화번호를 지우고 주소를 지우고 마지막 저녁의 표정도 지운다 새롭게 얼굴을 내민 아침의 각도가 거미줄에 걸려 있다 거미줄에서 부서지던 햇살들이 폭설로 흩날리는 밤에 나는 공중의 혈맥을 더듬던 금빛 거미를 찾는다 어제 살았던 아침을 껍질이 벗겨질 때까지 씻어내다가 어느덧 나는 국경 밖의 눈보라가 된다 열두 시간 전에 이국의 골목에서 듣던 눈썹 흰 노래였다 사라진 손으로 귀에 도착하지 않은 북극의 물소리를 만지는 밤 툰트라의 측백나무로 서서 여자의 몸에서 자라는 달을 본다 나는 들개 울음소리가 들리는 밤의 중심에서 밤을 포획하는 금빛 거미를 찾는..
2020.03.01 -
홍일표 / 저녁의 표정
홍일표 / 저녁의 표정 아직 끝나지 않은 어제의 노래 둥글게 뭉친 눈덩이를 허공의 감정이라고 말할 때 돌멩이 같은 내일이 아이스크림처럼 녹는다 깊게 파인 공중에서 밤이 태어나고 눈덩이의 부피만큼 훌쭉해진 허공은 너무 질겨서 삼킨 사람이 없다 바삭거리던 나뭇잎이 공중에 몸을 밀어넣을 때 저기 새가 날아가네 서쪽으로 기운 나무는 그것을 천 개의 손가락을 가진 바람의 연민이라고 말한다 바람이 남긴 죽은 새들과 함께 수런수런 모여드는 저녁 남은 허공을 쥐어짜면 새들의 울음이 주르르 흘러내리기도 하는 여기는 바닥에 노래가 새겨지지 않은 곳 표정 없이 자전거 바퀴살에 감겨 헛도는 하늘처럼 홍일표 / 저녁의 표정 (홍일표, 매혹의 지도, 문예중앙, 2012) https://www.instag..
2020.03.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