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 6. 3. 19:15ㆍ同僚愛/양안다
양안다 / 폭우 속에서 망가진 우산을 쥐고
당신이 금요일을 사랑해서 금요일에 만났다
금요일이면 같이 커피를 마시고
골목을 걷고
그러나 이상하게도 함께 식사를 한 적이 없지
저번 금요일에는 그림을 그렸다 내가 빈방을 스케치하는 동안
왜 사람을 그리지 않는 거죠, 당신이 말했다
다음 금요일에는 무엇을 할까
아내를 지독하게 사랑했다던 화가의 전시를 본다
아내가 바이러스에 감염되어 사망했대
화가는 신을 찾았을까
우리는 갤러리를 걸으며 화가의 미래로 향한다
저기, 저 새가 우리를 쳐다보고 있어요
교회가 세워진다
악마를 그렸구나 불구덩이에 화가의 미래가 있어
그런데
우리 미래는 어디에 있어?
*
누가 액자의 간격 같은 걸 정하는 걸까
나는 관람객을 관람하고 있을 죽은 화가의 영혼을 상상했다 그는 떠나는 관객을 웃으며 마중했으나 뒤돌아서자마자 표정을 굳힐 것이다 누구도 자신의 이야기에 귀 기울이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고 슬픔에 빠질 것이다 그들이 관심 갖는 건 그의 감각뿐이었으므로
죽음 뒤에도 죽음이 기다리고 있을까
숲 너머로 또 다른 숲이 보인다면
빛 한 점으로 어둠을 밝힐 수 있다면
가라앉고 가라앉은 곳에 평행 세계가 있다면
죽고 또 죽고 싶은 이야기들
어느 날 시나리오는 완성된다
음악 없는 세계에서 춤을 추는 무용수들과 예정된 희극을 축하하며 건네는 술과 사랑하는 이에게 오트밀 한 줌을 사 주기 위해 헤매던 수많은 거리와 상대의 몫까지 챙겨오는 우산과 산문을 읽고 난 후의 슬픔과 말라 버린 붓과 양을 치는 목동과 마른 어깨와 마른 어깨와 마른 어깨, 그리고 고립, 그리고 언젠가 작별
진심은 어디에 놓여 있나
만남과 마음은 왜 시작되나
한 사람의 일상을 뒤흔드는 존재는 왜 언제나 사람이었나
왜 그 사실이 사람을 슬프게 만들고는 끝내
슬픈 사람을 미치게 만드는가
그러나 영화는 먼 곳에 있다
그래서 사람들은,
영화가 먼 곳에 있기 때문에 사람들은……
*
우리의 어느 금요일, 공연이 절정에 다다를수록
피아니스트는 속도를 높여 손가락을 움직였다
당신은 숨이 막힌다고 했다
저 연주를 들으면 어딘가 견딜 수 없어져서
해서는 안 될 말을 해 버릴 것만 같다고,
자꾸 숨을 몰아쉬었다
우리는 도중에 공연장을 빠져나오고
당신은 공원 바닥에 주저앉아 나를 올려다보았다 그 눈을 들여다보자 왜 아무것도 비추지 않는지에 대해 의문이 들었다
당신은 말했다, "마음을 주고 싶었어요. 그게 잘 안 돼서 나는 나의 마음을 탓했어요."
누군가의 마음에 닿고 싶었다고,
누군가에게 말을 걸고
누군가에게 웃어 보이고
슬픔을 감추며
마음을 시작하는 방법에 대해 알고 싶었다고……
나는 나를 억누르며 말하고 싶었다
마음, 그것은 지금 바로 이 순간의 극단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머나먼 과거에서부터 축적되어 형성되는 것이라고……
나는 당신과 눈을 맞춘 채
그 어둠 속을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그곳에서 나를 찾을 수 없었다
당신은 나의 두 발을 묶지
다가갈 수 없도록
멀어질 수 없도록
어두워
이곳은 어둡고
이미 내 몸은 붕 떠 있는 듯해
집으로 가는 길은 멀고
자꾸만 멀어지지
가라앉은 채로 걷는 꿈
너는 계속 멀어진다
숲의 소실점을 향해
숲에서 숲으로
더 깊은 숲으로
너는 빛을 밀어내며 시야에서 사라진다
*
어느 날 남자는
그동안 자신과 붙어 있었다는 사실을 잊고 있던,
주머니 안에서 오랫동안 삭아 가고 있었을
메모 하나를 발견했다
남자는 진료를 기다리고 있었다 책으로 가득한 대기실의 책장, 그중에 남자가 뽑아 든 것은 경주마에 관한 그림책이었다 책을 펼치자 무수한 말들이 얼굴 위를 짓밟으며 달려갔고 남자는 표정을 주체할 수 없었다
그날 남자가 메모한 구절은 이러했다
'잠어는 눈에 품은 빛의 무게를 가늠하려고 바닥을 쳤던 것이다. 그 한 번의 침몰이 평생을 헤엄치게 만든다. 빛의 열쇠를 가졌으니 꼬리는 점력을 끊고 한없이 떠오를 수 있다.'
*
당신을 집까지 부축하던 금요일은
오래 걸었다 정말 오랫동안 헤맸다 누구보다 잘 아는 그 길을
오래오래 돌아 걸었다
그러나
비가 쏟아지는 동안
나는 망가진 우산을 손에 쥐고
누가 우리의 간격을 정하는 걸까
영화는 가끔 현실 같은데
현실은 자주 영화 같은데
당신과 있으면 나는 날 정돈하고 싶어지지
그러나 당신은 아닐 거라는 불안 속에서
나의 방에는 사람이 살지 않습니다
나는 좋은 사람이 아닙니다
나는 예쁜 사람이 아닙니다
표정을 잘 가꾸기 위해 애쓸 뿐
아무도 나를 사용할 수 없습니다
폭우가 오고 있나요
*
금요일에 만나요
금요일에 웃어요 내가 먼저 가 있을게요
마지막 미래,
그런 건 다 잊어요
나는 발목을 끊어 냈는데
아직도 바깥에는 숲이 우거지고 있나요
우리 금요일에 만나요
나는 걷다가도 빛에 빠지니까
너와 함께
너와 함께
당신은 아무런 의심 없이 손을 흔든다 우리의 다음이 기약되어 있다는 듯이
그러나 다음은 먼 곳에 있다
그런데도 당신은,
함께 식사를 한 적이 없는데도 당신은……
양안다 / 폭우 속에서 망가진 우산을 쥐고
(양안다, 숲의 소실점을 향해, 민음사, 2020)
'同僚愛 > 양안다' 카테고리의 다른 글
양안다 / 안녕 그러나 천사는 (1) | 2020.11.29 |
---|---|
양안다 / 다큐멘터리 (1) | 2020.09.12 |
양안다 / 미열 (1) | 2020.08.20 |
양안다 / Parachute (1) | 2020.06.01 |
양안다 / 오전 4시, 싱크로니시티, 구름 조금, 강수 확률 20% (1) | 2020.02.2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