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연 / 삽화
2020. 6. 14. 19:49ㆍ同僚愛/허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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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연 / 삽화
알약들처럼 빗방울이 성긴 저녁. 용케 젖지 않은 자들의 안도 속에 하루가 접히고 있었다.
퇴근 무렵. 아버지가 당신의 결혼사진을 들고 찾아왔다. 자꾸 빛이 바랜다며 어떻게 할 수 없겠냐고 비닐봉지에 싸온 사진을 내밀었다.
사진 속 어머니의 드레스는 이제 완벽한 황토색이다. 친일파와 빨갱이 집안의 결합. 하객보다 기관원이 더 많았다는 집안 내력을 생각하며, 곁눈질로 사진을 보며, 나는 꼬리곰탕을 후후 불었다.
속으론 "살아 계실 때 잘 좀 하시지"라고 투덜댔지만, 반주까지 걸친 다혈질의 아버지에게 그 말은 차마 꺼내지 못했다.
비는 다음 날에도 계속됐고, 나는 비닐에 싸인 빛바랜 사진을 옆구리에 끼고 충무로 골목길을 헤맸다.
오늘도 뭔가 포기하지 않는 새들만 비를 맞는다.
허연 / 삽화
(허연, 내가 원하는 천사, 문학과지성사,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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