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원효 / 눈 내리는 아프리카

2020. 12. 12. 12:42同僚愛/조원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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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원효 / 눈 내리는 아프리카

빈 땅콩을 깨물었어

앞니가 깨져서

달리는 기차 안으로 해가 들어왔지

낮은 옅어지고

붉은 맛은 붉은 맛

애인은 오래된 영화를 보다가 잠에서 깨어났는데

겁에 질린 사람처럼 중얼거려

창밖의 풍경을 봐도 마음을 진정하지 못하는데

화물칸에 모래먼지를 듬뿍 묻혀가며

기차는 서쪽으로 서쪽으로 달린다

바퀴가 녹아가니까

앞니가 흔들리지

낮은 선명해지고

애인은 갑자기 울고

이유를 물어도 말하질 않는데

꼬리 칸에서 노름을 하던 여자들은 마시던 술을 멈췄지

단지 햇빛이 비추는 곳으로 손을 들었고

같은 맛의 손가락만 빨아댔지

기차는 햇빛을 싣고

가볍고 왜소해 질 때까지

무작정 달릴 뿐

기차는 알기 위해 달리고 알지 못해 달릴 뿐

앞니가 와르르 복도에 쏟아진다

창가에 얼굴을 대면

이빨 사이에서 붉은 실이 흘러나오지

사람의 혈관을 두 번 풀어내면

적도면을 감을 수 있다는데

애인은 우는 얼굴로

자신의 혈관을 태양에 감고 싶다고 말한다

기차가 절벽에 부딪혀

천천히 바다에 처박혀도

앞 칸도

꼬리 칸도

붉은 실로 감을 수 있다면

붉은 실에 죽을 수 있다면

물살이 복도 끝에서부터 밀려들어오는 동안

여자들은 마작을 어금니 사이에 끼워 넣지

애인은 총을 입 안에 밀어 넣지

붉은 맛은 붉다

그저 앉은 자리에서 일어나 고함을 질렀는데

우리는 서쪽이란 느낌이 드는 곳에서

아무 이유 없이 맞고만 있었지

 

 

 

조원효 / 눈 내리는 아프리카

(편집부, 시인동네 11월호, 시인동네, 2018)


https://www.instagram.com/donkgrin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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