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원효 / 불청객들

2020. 12. 12. 12:46同僚愛/조원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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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원효 / 불청객들

애인은 자주 손목을 그었다

고독한 여왕처럼

아침이면 나와 식탁에 마주 앉고. 철제 갑옷도 맞춰 입고. 빳빳하게 굳은 손목으로 체스를 두었다. 체스 판이 입을 벌린다. 왜 그렇게 혀를 날름거리니. 소매 틈으로 피가 흐르니까. 벽난로가 불타오른다. 창문에 부딪힌 새 떼가

자꾸 같은 패턴으로 죽는다

문 앞에 손님이 벨을 눌렀다. 경찰이야. 잘 부탁해. 나는 바게트 빵에 대해 생각하고 영국의 궁전에 대해 말할 줄 알아. 나쁜 피를 흘렸지만 구체성은 없어. 그녀의 말은 깃털처럼 가벼워서

체크 메이트

해가 지면 체스 판이 작아진다. 화분에 놓인 돌이 간신히 호흡한다. 네가 비숍을 움직일 걸 알아. 그녀는 조용히 웃으며, 내가 작은 나라의 왕이라고 말했다. 몸을 일으켜 부엌으로 달려갔다. 재빨리 나는 손목을 그었다.

그럴 리가 없다고

싱크대 물에 피가 닿았다. 흘릴 게 많아 또 아팠다. 멀리 시선을 던지면 창문이 깨진다. 집 안의 사물들이 일제히 경직된다. 경찰은 문을 따고 들어왔다. 그녀가 실종됐어요. 수챗구멍이 개미 떼를 빨아들이니까

퀸이 없군요

거짓말. 거짓말이야. 뭉그러진 포크와 식칼을 입에 물고. 줄어드는 손과 발을 이웃집에 맡겨 놓고. 장롱 속에 네가 울고 있는데. 이젠 숨지 마. 머리카락은 뽑지 않아도 돼. 커다란 손이 우리를 짚고 흔들었을 때

규칙이 구성됐다

커튼을 치면 어둠에 쫓겨 모두가 퇴장할 것이다

 

 

 

조원효 / 불청객들

(편집부, 문장 웹진 5월호, 문장 웹진, 2019)


https://www.instagram.com/donkgrin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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