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 6. 6. 18:44ㆍ同僚愛/이민하
누드비치라는 말은 기분이 좋다
먼 나라 사람 이름 같다
귀르비치 말코비치 이바노비치
나랑은 상관이 없는 것 같다
달리는 말 위의 소나기 같고
골목 끝 신혼집에서 불어오는 콧노래 같고 그곳에선
밤이면 까르르 한 쌍의 깃털베개도 날아다닌다
말을 달려도 말을 멈춰도 소나기는 내린다
베개 솔기가 터지도록
찢어지게 웃다가 찢어지는 연인과 찢어지게 가난해서 찢어지는 가족과 찢어지게 낡아서 찢어지는 책들과
속수무책이 쌓여서
읽을 수 없는 날이 오고
창 밖의 창 밖의 창 밖의 별을 더듬으며
과거를 알고 싶어요?
나체로 말을 하면 이야기가 달라질까
그런데 왜 양말은 신고 있죠?
그것이 이름표라는 듯이
아직 벗을 게 더 남았다는 듯이
국경을 벗으면 세계는 하나라는 듯이
유럽 아시아 아프리카
얼기설기 발 담근 지중해 어디쯤
난민들은 난민의 옷을 벗고
남루한 모국어를 벗고
그을린 피부색을 벗고
모든 걸 벗고 나면 새사람이 될까
뼈대를 벗고 핏줄도 벗고
죽고 나면 모든 게 투명해질까
열 달 동안 물을 건너 우린 국적을 얻었는데
난파된 바다 위에는
기다리는 꼬부랑 산파도 없이
깃털을 날리던 골목의 여자는 어느 날
배 속의 물결을 가득 안고 뒤뚱뒤뚱 혼자서 지나갔다
기저귀처럼 깔려 있는 백모래밭을 지나 물속에서 잠이 든 아이들을 지나 물가를 종일 기어 다니는 나를 지나
나는 어디서부터 뚜벅뚜벅 지나가버렸을까
벽 속의 벽 속의 벽 속의 의자에 앉아
마음은 말더듬이같이 더듬거리는데 눈 감고도 두부를 자르듯
나는 언제부터 한국어를 또박또박 쓰게 됐을까
누드비치라는 말은 눈물이 난다
나랑은 상관이 없는 것 같다
오르골 야광별 깊고 푸른 젖비린내
어딘가 두고 온 해변 같다
더 벗을 수 없는 물방울들이 날아다니고
아침이면 한 줌씩 떠내려와
다 벗을 수 없는 내 얼굴을 무심히 스쳐갔다
이민하, 미기후, 문학과지성사,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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