골목(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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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훤 / 미아
이훤 / 미아 당신은 후하게 나의 슬픔을 챙겨 사라진다 오래 듣는 자에게 복이 있고 나는 달아나려 했다 전부 갚지 못할까봐 도망치는 골목마다 기다린다 당신을, 어차피 또 달아날 거면서 나를 꺼내는 일에 인색한 나더러 당신은 매번 고맙다고 했다 미아처럼 몇 단어 앞뒤로 오가기만 반복하고 아무도 모르는 미소를 닦는다 큰일이다 달아나는 곳이 자꾸 당신으로 변모하고 있다 이훤 / 미아 (이훤, 너는 내가 버리지 못한 유일한 문장이다, 문학의전당, 2016) https://www.instagram.com/donkgrine/
2020.03.01 -
박준 / 야간자율학습
박준 / 야간자율학습 저녁이면 친구들은 화장실에서 교복을 갈아입고 주공아파트 단지를 돌며 배달을 했다 성동여실 여자애들은 치마통을 바짝 줄여 입었지만 안장을 높이 올린 오토바이에도 곧잘 올라탔다 집을 떠나면서 연화는 가난한 엄마의 짙은 머리숱과 먼저 죽은 아버지의 하관(下觀)을 훔쳐 나와 역에서 역으로 떠났다 황달을 핑계로 오랫동안 학교에 가지 않았다 책상 밑에 있는 내 침통이 굴러다닐 게 분명했다 졸업은 멀기만 하고 벌어진 잇새로 함부로 뱉어낸 말들이 후미진 골목마다 모여앉아 낄낄 웃고 있었다 박준 / 야간자율학습 (박준, 당신의 이름을 지어다가 며칠은 먹었다, 문학동네, 2012) https://www.instagram.com/donkgrine/
2020.02.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