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자(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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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리 「꽃꽂이」
어쩌면 며칠 생활을 잠시 두고 온 것뿐인데 오늘은 새벽에 눈을 떴습니다 날이 벌써 밝아지고 있어서 수평선이 보일 것 같아서 숲을 걷다 노래를 부르고 생선 구이를 먹다 혼자라는 단어에 가시가 박혔길래 그냥 살다 보면 다 넘어가겠지 싶었는데 그런 결론은 너무 무책임했는데 책임지는 건 또 왜 이리 싫은지 보기만 해도 좋을 이 삶을 누가 꺾어 갔으면 하는 바람에 모르는 사람에게 말도 걸어보았습니다 갑판 위에 올려놓은 말린 오징어들 뜯은 빵 부스러기들 나날들 모두 당신 것이지요 눈빛을 부러뜨리고 도망쳤습니다 구두를 벗으니 살갗이 까진 뒤꿈치 바다는 혼잣말을 하지요 계절을 실재하는 것으로 증명하기 위해 비와 눈이 내리고 나무는 열매와 잎을 맺고 열매와 잎을 떨구고 바닥은 낙엽을 치우고 ..
2022.04.20 -
정다연 「월화수목금토일」
잘 지내? 누가 묻지도 않았는데 잘 지내 답하고 싶은 순간이 있습니다 오늘은 당신에 대해 참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당신이 좋아하던 음식을 올려놓고 기름기 묻은 손을 세제로 씻으며 물기를 닦던 사소한 습관과 벨을 누르면 가장 먼저 반겨주던 당신에 대해 수화기 너머로 들려오던 음성에 대해 - 잘 지내고 있어? 벽장에 비치는 것이라곤 그림자 하나뿐인데 문득 묻고 싶은 순간이 있습니다 비를 모으고 모으다 못 견디고 무너지는 댐처럼 폭설에 쓰러지는 나무처럼 어떻게 지내 묻고 싶은 순간이 - 오늘은 당신에 대해 이야기를 참 많이 나누었습니다 당신이 좋아하지 않던 음식을 앞에 두고 왜 싫어했을까? 이렇게 먹기 좋은 것을 웃으면서 월화수목금토..
2021.11.07 -
조해주 「다큐멘터리」
나는 달의 입체성을 믿지 않는다. 그것에게 옆모습이 있다고? 원숭이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유리 너머의 원숭이는 뾰족한 이빨을 드러내며 내게 바나나 껍질을 던진다. 원숭이의 자리에서 바라보면 유리에 비친 자신의 붉은 얼굴과 긴 코트를 입고 멀뚱히 서 있는 내 모습이 겹쳐 있다. 어쩌면 원숭이는 나를 자신의 영혼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다. 악몽 같은 형상을 향해 먹을 수 있는 것과 먹을 수 없는 것. 원숭이에게 우리이고 내게는 화면인 것. 그것에 얼굴을 가져다 댄다. 유리는 너무 차가워서 눈을 감고 있으면 유리와 닿은 부분 말고는 모두 지워지는 기분이다. 원숭이의 공격성이 유리를 깨부술 수는 없을까. 원숭이는 내가 서 있는 곳이 바깥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고개를 돌리거나 등지고 앉지..
2021.04.16 -
신철규 / 저녁 뉴스
신철규 / 저녁 뉴스 해변에 벗어놓은 옷들처럼 하루가 덩그러니 놓여 있다 공중에 뜬 볼 배트를 든 채 홈베이스를 떠나지 못하는 타자 아직은 너무 이른 것이 아닐까 이 정도에서 그만 포기해야 하지 않을까 네 생각 때문에 거질 바닥에 있던 리모콘을 밟아 박살내고 단추를 잘못 끼우고 엉뚱한 버스를 탄다 손끝까지 타들어온 담배에 손을 데고 신호등 앞에서 무심코 비닐봉지를 떨어뜨린다 야구공이 시야에 나타날 때까지 고개를 꺾고 공중을 바라보는 외야수 야구공을 삼킨 구름 저녁 뉴스 시간은 점점 다가오고 그림자가 길어지다가 더이상 움직이지 않는다 네 눈 속에는 대관람차가 천천히 돌아가고 흘러내린 앞머리를 무심코 올려주려다 빈 물컵을 입으로 가져간다 마지막 구원 투수가 마운드에 올라 야구화 ..
2020.12.02 -
황인찬 / 실존하는 기쁨
황인찬 / 실존하는 기쁨 그는 자꾸 내 연인처럼 군다 이럴 땐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 그래서 그와 팔짱을 끼고 머리를 맞대고 가만히 오래도록 앉아 있었다 아는 사람을 보았지만 못 본 체했다 그래야 할 것 같았지만 확신은 없다 아파트 단지의 밤 가정의 빛들이 켜지고 그것이 물가에 비치고 있다 나무의 그림자가 검게 타들어 가는데 이제 시간이 늦었다고 그가 말한다 그는 자꾸 내 연인 같다 다음에 꼭 또 보자고 한다 나는 말없이 그냥 앉아 있었고 어두운 물은 출렁이는 금속 같다 손을 잠그면 다시는 꺼낼 수 없을 것 같다 황인찬 / 실존하는 기쁨 (황인찬, 희지의 세계, 민음사, 2015) https://www.instagram.com/donkgrine/
2020.08.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