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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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달자 「겨울 그 밤마다」
물이 끓고 있다 어느 젊음이 조금씩 줄어들며 끓고 있었다 난로가에는 물수건 하나가 물기를 가시며 말라가고 누구의 넋인가 하얀 김이 천장을 향해 나르고 있다 사라져 어둠이 되는 한 방울 물의 흔적이 내 가슴 중심에 맺혀 끓어오른다 속도를 좁히며 끓는 물소리 초조로이 멀어져 가는 소리를 이어 받으며 물이 졸아든다 달아오른 빈 주전자에 찬물을 따르는 겨울밤 겨울밤 양팔을 벌리며 머리 위부터 찬물을 끼얹는 나의 젊음아 밤마다 밤마다 잠 속으로 이끌고 들어 가는 미완의 고백 미완의 용서 그런 것의 그림자가 흔들리며 베개 모서리 어디쯤서 끓고 있다 끓고 있다 나의 젊음이 조금씩 줄어 들며 끓고 있었다. 신달자, 백치슬픔, 자유문학사, 1989
2021.02.03 -
유진목 「미시령」
몇 개의 터널을 지나 아버지를 발견했을 때 아버지는 평생을 걸어 이곳에 온 것 같았다. 눈 덮인 도로에 다리를 끌며 아버지는 오늘 본 것을 아무에게도 말해서는 안 된다고 했다. 한참을 찾고 한참을 기다렸는데 여기가 어딘지 언제인 것인지 아버지는 모르는 것 같았다. 방금 네 엄마를 묻었다 일찍 왔으면 너도 도왔을 것을 아버지는 곱은 손을 내밀어 헤드라이트에 스치는 눈발을 어루만졌다. 아버지 아버지 얼굴에 뭐가 묻었어요 나는 손을 뻗어 김이 서린 유리를 닦았다. 무엇이든 잊지 않으면 너도 나와 같이 되고 말 거다 아버지의 눈꺼풀은 얼어붙은 것처럼 떨어지지 않았다. 엄마가 계속 너에게 계속 연락한 것을 알고 있지 하지만 너는 혼자 생겨난 것처럼 살고 있더구나 아버지의..
2021.01.13 -
안도현 / 만두집
안도현 / 만두집 세상 가득 은행잎이 흐득흐득 지고 있었다 고등학교 시절 늦가을이었다 교복을 만두속같이 가방에 쑤셔넣고 까까머리 나는 너를 보고 싶었다 하얀 김이 왈칵 안경을 감싸는 만두집에 그날도 너는 앉아 있었다 통만두가 나올 때까지 주머니 속 가랑잎 같은 동전을 만지작거리며 나는 무슨 대륙 냄새가 나는 차를 몇 잔이고 마셨다 가슴을 적시는 뜨거운 그 무엇이 나를 지나가고 잔을 비울 때마다 배꼽 큰 주전자를 힘겹게 들고 오던 수학 시간에 공책에 수없이 그린 너의 얼굴은 아무 말이 없었다 귀밑에 밤알만한 검은 점이 있는 만두집 아저씨 중국 사람과 웃으면 덧니가 처녀 같은 만두집 아줌마 조선 사람 사이에 태어난 화교학교에 다닌다는 그 딸 너는 계산대 앞에 여우같이 앉아 있었다 한 번도 ..
2020.03.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