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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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이우 / 이루지 못한 것들
유이우 / 이루지 못한 것들 오후를 타고 쿠션은 떨어져내린다 너는 화가가 되었구나 너는 화가를 포기했구나 꿈이 널브러진 햇빛 퍼져 사라지는 빛 좋은 날들이 계속되었다 완전히 다른 좋은 날들이 계속되었다 유이우 / 이루지 못한 것들 (유이우, 내가 정말이라면, 창비, 2019) https://www.instagram.com/donkgrine/
2020.12.27 -
황인찬 / 퇴적해안
황인찬 / 퇴적해안 기억할 수 있는 가장 오래된 것은 어릴 적 보았던 새하얀 눈밭 살면서 가장 슬펐던 때는 아끼던 개가 떠나기 전 서로의 눈이 잠시 마주치던 순간 지루한 장마철, 장화를 처음 신고 웅덩이에 마음껏 발을 내딛던 날, 그때의 안심되는 흥분감이나 가족들과 함께 아무것도 아닌 농담에 서로 한참을 웃던 날을 무심코 떠올릴 때 혼자 짓는 미소 같은 것들 사소하고 작은 것들이 쌓이고 쌓여서 그런 것들에 떠밀려 여기까지 왔다는 생각을 하게 되는 평범한 주말의 오후 거실 한구석에는 아끼던 개가 엎드려 자기 밥을 기다리고 있었다 엄마, 얘가 왜 여기 있어 그럼 지금까지 다 꿈이야? 그렇게 물었을 때, 집에는 아무도 없었고 개만 엎드려 있었다 바깥에는 눈이 내린다 나는 개에게 밥..
2020.12.24 -
서대경 / 여우계단
서대경 / 여우계단 여우계단 꿈에서 밝은 허공을 만나고 돌아오는 길에는 잿빛의 높은 담벽들이 골목 양편으로 끝없이 뻗어나갑니다 하수구에서 올라온 검은 쥐들이 일렬로 벽 위를 기어갑니다 나는 담벽에 매달려 저편에 서 있는 못 보던 공장들과 못 보던 아버지들을 봅니다 공장 굴뚝에서 검은 연기가 피어오릅니다 아버지는 목장갑을 벗고 철근 더미 위에 앉아 담배를 뭅니다 공장 앞으로 흑백의 강이 흘러갑니다 아버지 곁에 누워 있던 개들이 일제히 송곳니를 드러내며 이쪽을 향해 짖어댑니다 나는 조금 걸음을 빨리합니다 계단을 올라가는데 어릴 적 동화에서 보았던 작은 여우가 보였습니다 여우는 계단 한쪽 구석에서 빙빙 맴을 돕니다 잔뜩 찌푸린 하늘 아래서 여우는 은은히 빛납니다 속삭임이 퍼지고 여우의 율동이 밝..
2020.11.29 -
구현우 / 공중 정원
구현우 / 공중 정원 한낮의 정원에서 아픈 꿈을 꿨다 막연하니까 더 분명한 마음이 있었다 한밤의 초목 완연한 구조물 앞에서도 통증이 지속되었다 꿈속에는 둘만 있었고 모르는 너를 아는 이름으로 불러주고 싶었지만 혀끝이 굳어버렸고 흙냄새가 지독하게 너무나 독하게 감돌았다 실재하는 정경이 꿈의 정원을 닮아간다는 게 제 아름답지만은 않았고 한낱 코끝에 맺혀 있는 네가 어떻게 미워질 수 있는지 신비로웠다 마지막을 짐작하지 못해서 꿈은 다만 끝을 향해가고만 있었다 물린 데가 없는데도 말할 수 없는 어느 부위가 참을 수 없이 가려웠다 아무도 나를 기다리지 않고 아무것도 끝난 건 없어서 아픈 곳이 늘어난 후에야 비로소 천국을 그리워했다 예술이 있는 정원을 벗어나고도 나의 서사..
2020.07.16 -
임성용 / 아내가 운다
임성용 / 아내가 운다 막걸리를 마시고 아내가 운다 적금통장과 육십 만원 월급을 내놓고 혼자, 새벽까지 운다 나는 그 울음 곁에 차마 다가설 수 없다 눈물을 참으라고 등 다독이며 함께 울어주거나 손수건을 건넬 수 없다 그것은 너무 뻔한 위선이라서 말없이 이불을 쓰고 잠자는 척한다 미안하다는 말이 앞으로 행복하게 잘 살자는 말이 더 불행한 약속임을 왜 모르겠는가 애초에 나 같은 사람 만나지를 말지 억지를 부리면 부릴수록 하나씩 부러지는 아내의 뼈 진짜 아픈 건 뼈마디에 도사린 꿈이다 울음 눈물 참고 죽을 때까지 허약한 꿈을 믿고 산다는 건 얼마나 무서운 악몽인가 차라리 악다구니를 쓰고 멱살을 잡고 집을 뛰쳐나가 끝장을 내는 것보다 밤새 흐느껴 운 아내가 씽크대 서랍에 약봉지를 숨겨놓고 또 아침이..
2020.04.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