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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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희연 「설경」
다 망가져버렸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어 눈이나 펑펑 와버렸으면 지나고 보니 모든 게 엉망이어서 개들이라도 천방지축 환하게 뛰어다닐 수 있게 새하얀 눈밭이었으면, 했지 그래서 그리기 시작했다네, 눈에 파묻힌 집 눈만 마주쳐도 웃음을 터뜨리던 두 사람이 이제 더 이상 살지 않는 집 깨진 계란껍질 같던 마음도 같이 파묻었지 캔버스 앞으로 모여드는 사람이 많았다 아무도 밟지 않은 흰 눈에는 그런 힘이 있으니까 곰은 곰의 발자국을 찍고 가고 바람은 바람의 발자국을 찍고 가고 모두들 자기 발자국을 들여다보기에 바빴다 그 집은 악몽으로 가득 차 있다고 소리쳐도 아무도 믿지 않았다 지붕까지 파묻힌 집이 어떻게 공포스럽지 않은 거야? 내게는 모든 게 엉망이었던 시간인데 사랑과 낮잠은 참 닮은 구석이..
2021.03.21 -
이근석 「여름의 돌」
나는 토끼처럼 웅크리고 앉아 형의 작은 입을 바라보았다. 그 입에선 미래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형한테선 지난여름 바닷가 냄새가 나, 이름을 모르는 물고기들 몇 마리 그 입속에 살고 있을 것만 같다. 무너지는 파도를 보러 가자, 타러 가자, 말하는 형은 여기 있는 사람이 아닌 것 같다. 미래를 이야기했다. 미래가 아직 닿아있지 않다는 사실이 형을 들뜨게 했다. 미래는 돌 속에 있어, 우리가 아직 살아보지 못한 이야기가 번져있어, 우리가 미래로 가져가자, 그때 우리는 서로를 바라본다. 그동안 우리는 몇 번 죽은 것 같아. 여름, 여름 계속 쌓아 올린 돌 속으로 우리가 자꾸만 죽었던 것 같아. 여기가 우리가 가장 멀리까지 온 미래였는데 보지 못하고 우리가 가져온 돌 속으론 지금 눈이 내리는데 ..
2021.01.16 -
허연 / FILM 2
허연 / FILM 2 신은 추억을 선물했고 우리는 근본이 불분명한 젤리를 씹으며 참 많은 것을 용서했다 가끔씩 어떤 끔찍함이 탄환처럼 빠르게 삶을 관통하고 지나갔지만 뜨거움은 그때뿐이었다 탄환의 고통을 생각하면 눈물이 흘렀다 태생적인 방관자들이 부러웠고 느티나무의 실어증이 부러웠다 그날그날의 슬픈 방을 찾아들어가며 우리는 울고 있었다 눈이 내렸다 수만 년 전 조상들이 이러했을까 그들도 눈을 맞으며 울었을까 아무것도 저지르고 싶지 않아서 밤새 울었다 따뜻한 오줌을 누며 방점을 찍듯 깜빡이는 가로등에 기대 느린 노래를 부르기도 했다 수십만 년 동안 같은 모양의 눈송이는 한 번도 내린 적이 없었다 밤새 눈은 연옥을 덮고 있었다 허연 / FILM 2 (허연, 오십 미터, 문학과지성사, 20..
2020.12.31 -
서안나 / 냉장고의 어법
서안나 / 냉장고의 어법 사과가 반쯤 썩었다 아픈 쪽에서 단내가 난다 썩지 않기 위해 우리는 우는 법을 배웠다 죽음의 향기로 내일은 선명할 것이다 어둠 속에서는 사랑이 크게 들린다 열면 환하고 닫으면 캄캄하다 다친 어깨로 자신의 어둠 쪽으로 돌아눕는 것이다 사랑도 그러하다 썩어가는 사과가 썩지 않는 몸 한쪽을 들여다보듯 이별은 훔친 마음을 다시 훔치는 것이다 이빨을 세게 물고 권투선수처럼 두 뺨으로 웅웅거리는 냉장고 열어도 닫아도 속은 비리다 이별도 그러하다 때린 뺨을 다시 때릴 때 젖은 두 손이 아름답다 두 눈 사이가 너무 가깝다고 생각한 탓이다 서안나 / 냉장고의 어법 (서안나, 립스틱 발달사, 천년의시작, 2013) https://www.instagram.com/donkgrine/
2020.10.24 -
이응준 / 고해
이응준 / 고해 괴로워 죽고 싶을 때는 눈을 감고 맹인들을 생각한다. 눈을 뜬다. 세상이다. 죄스러워 웃는다. 이응준 / 고해 (이응준, 애인, 민음사, 2012) https://www.instagram.com/donkgrine/
2020.03.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