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다(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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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진목 「만리」
그는 바다에 나갔다가 한참 키가 자라는 아이처럼 돌아오곤 했다. 분명한 나의 아이처럼 이제 더는 품을 수 없는 품에 안고 만질 수 없는 물에 오르자 장성한 사내가 되고 여기서 우리의 이야기는 잠시 멈춘다. 나는 젊은 여자의 몸으로 일어난다. 그는 숨을 참고 더 먼바다로 가고 싶다. 금방 돌아오겠다는 말을 하고서 우리는 오랫동안 살아왔다. 유진목, 작가의 탄생, 민음사, 2020
2021.01.13 -
최승자 / 개 같은 가을이
최승자 / 개 같은 가을이 개 같은 가을이 쳐들어온다. 매독 같은 가을. 그리고 죽음은, 황혼 그 마비된 한쪽 다리에 찾아온다. 모든 사물이 습기를 잃고 모든 길들의 경계선이 문드러진다. 레코드에 담긴 옛 가수의 목소리가 시들고 여보세요 죽선이 아니니 죽선이지 죽선아 전화선이 허공에서 수신인을 잃고 한번 떠나간 애인들은 꿈에도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 그리고 그리고 괴어 있는 기억의 폐수(廢水)가 한없이 말 오줌 냄새를 풍기는 세월의 봉놋방에서 나는 부시시 죽었다 깨어난 목소리로 묻는다. 어디만큼 왔나 어디까지 가야 강물은 바다가 될 수 있을까. 최승자 / 개 같은 가을이 (최승자, 이 시대의 사랑, 문학과지성사, 1981) https://www.instagram.com/donkgrine/
2020.06.22 -
박연준 / 융단, 모르핀, 매니큐어에게
박연준 / 융단, 모르핀, 매니큐어에게 까만 바다에 빠져봤어? 사람들은 날마다 바다의 도시화를 꿈꾸지 두려워하지 마 내 상체가 해초처럼 흔들리고 팔이 별안간 여덟 개가 되지 어젯밤 너희 셋을 위해 팔을 다섯 개나 뽑았어 그런데 왜 먹지 않았니? 전화벨이 끊겼다, 이어졌다 반복되고 나는 그 반복 사이에서 액체가 된다 보글보글, 기다림이 삭는 소리 소리는 물속에 잠기면 진동이 되지 그건 물들의 비명이야 사랑을 잃고, 띄엄띄엄 울다 자는 밤 산화되는 기억 속 너희들의 지느러미, 누군가를 부르는 파닥이는 힘- 하늘을 봐 바람이 별을 작곡하고 있어 박연준 / 융단, 모르핀, 매니큐어에게 (박연준, 아버지는 나를 처제, 하고 불렀다, 문학동네, 2012) https://www.instagram.com/d..
2020.04.03 -
김희준 / 생경한 얼굴
김희준 / 생경한 얼굴 따라와 바다를 지나면 골목이 나올 거야 왼쪽으로 돌거나 두 블록 먼저 꺾거나 아무튼 전등이 축축하게 켜질 때 첫 번째로 보이는 여관 말이야 거기서 혼자가 아닌 우리였던 적이 있어 비린내 나는 이야기지만 바다가 고요해지고 달이 차오르면 낯선 냄새로 북적이는 그 동네 말이야 여관 방 벽지에 낙엽이 말라가고 그리움이 천장까지 닿을 때 우리는 버석버석한 섹스를 나누었지 그날 우리는 시소를 탔어 갈망의 무게만큼 발돋움이 심했던가 나는 언제나 낮은 부분이라고 생각했는데 모르겠다 너는 모래에 발이 패인다고 투덜거렸지 돌아온 방안에서 우리는 양말을 뒤집어 조개를 찾거나 퇴적층 겹겹이 냄새를 말렸어 몰래 배가 부풀기를 기다렸던 것 같아 내 몸에 쌓이는 게 모래나 바다라면 잠든 네 발로 내 속..
2020.02.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