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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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우신 「리플리컨트 노트」
다음번 잠은 깔끔하게 넘어갔으면 좋겠다 나는 왜 자꾸 눕지 스르륵 날리지 허리에 흰 천을 감고 내려앉고 싶다 온도가 달라지는 빛을 겪으면서 조금 더 자라고 싶다 바람의 방향에 따라 손의 모양이 달라진다 투명에 가까워진다 생아편이 들어 있는 식물을 가꿀 시간은 없겠지 아늑하고 느리게 이빨을 뽑고 아가미를 달 것이다 낯선 숨을 머금고 너의 꿈속으로 불쑥 찾아갈 것이다 알약을 모으고 신발을 정리했어요 바람이 기다란 머리카락을 갖고 싶다고 말했어요 어떻게 하면 당신이 나를 자주 떠올릴 수 있을지 나를 걱정해주던 그 눈빛으로 내 이마를 쓸어준다면 좋을 텐데 아주 깊은 잠에 빠질 텐데 깨어날 때마다 사라지는 등 평생 불안에 떨며 뛰어다니던 영양은 어느 날 무리에서 이탈하기로 작정했다 내심 ..
2021.01.01 -
허준 / 고백의 탄생
허준 / 고백의 탄생 휴게소에서 프렌치 토스트를 베어 물고 문을 열고 나왔을 때 당신을 만났다 그때 혹은 전생의 어느 길에서 우리는 그 후 시간으로 덧칠이 되어 서로를 알아볼 수 없게 된 후에 한쪽이 빈 가슴으로 일면식이 없었던 당신이 지나쳐갈 때 아직 이별을 알지 못하는 말처럼 심장이 뛰었다 그때 나는 계단을 내려가고 당신은 올라오는 중이었는데 이미 우리는 서로를 느끼고 있었지만 바람 탓이었을까 이마가 싸늘하게 식었다 서로를 바라보던 그 짧은 만남도 금방 식었다 흘깃 당신의 일생을 보았다 그때 나를 감싸고 있던 모든 방어를 내려놓았고 저편에서 한 세계가 무너지고 있었다 우리 만남의 기록은 입으로 기록되지는 않을지라도 고백이라는 형식으로 남을 것이다 그 책은..
2020.08.10 -
남진우 / 로트레아몽백작의 방황과 좌절에 관한 일곱개의 노트 혹은 절망 연습
남진우 / 로트레아몽백작의 방황과 좌절에 관한 일곱개의 노트 혹은 절망 연습 1. 그 겨울 내 슬픈 꿈은 18세기 외투를 걸치고 몇닙 은전과 함께 외출하였다. 목조의 찻집에서 코피를 마시며 사랑하지 않는 여인의 흰 살결, 파고드는 쾌감을 황혼까지 생각하였다. 때로 희미한 등불을 마주 앉아 남몰래 쓴 시를 태워버리고는 아, 그 겨울 내 슬픈 꿈이 방황하던 거리, 우울한 샹송이 정의하는 토요일과 일요일 그 숱한 만남과 이 작은 사랑의 불꽃을 나는 가슴에 안고 걷고 있었다. 2. 밤 열시, 시계의 태엽을 감으며 그녀의 살속으로 한없이 하강하는 헝가리언 랩소디, 따스한 체온과 투명한 달빛이 적시는 밤 열시의 고독, 머리맡에 펼쳐진 십이사도의 눈꺼풀에 주기도문이 잠시 머물다 간다. 3. 날개를 ..
2020.06.12 -
서대경 / 벽장 속의 연서
서대경 / 벽장 속의 연서 요 며칠 인적 드문 날들 계속되었습니다 골목은 고요하고 한없이 맑고 찬 갈림길이 이리저리 파여 있습니다 나는 오랫동안 걷다가 지치면 문득 서서 당신의 침묵을 듣습니다 그것은 당신이 내게 남긴 유일한 흔적입니다 병을 앓고 난 뒤의 무한한 시야, 이마가 마르는 소리를 들으며 깊이 깊이 파인 두 눈을 들면 허공으로 한줄기 비행운(飛行雲)이 그어져갑니다 사방으로 바람이 걸어옵니다 아아 당신, 길들이 저마다 아득한 얼음 냄새를 풍기기 시작합니다 서대경 / 벽장 속의 연서 (서대경, 백치는 대기를 느낀다, 문학동네, 2012) https://www.instagram.com/donkgrine/
2020.05.21 -
최현우 / 발레리나
최현우 / 발레리나 부슬비는 계절이 체중을 줄인 흔적이다 비가 온다, 길바닥을 보고 알았다 당신의 발목을 보고 알았다 부서지고 있었다 사람이 넘어졌다 일어나는 몸짓이 처음 춤이라 불렸고 바람을 따라 한 모양새였다 날씨는 가벼워지고 싶을 때 슬쩍 발목을 내민다 당신도 몰래 발 내밀고 잔다 이불 바깥으로 나가고 싶은 듯이 길이 반짝거리고 있다 아침에 보니 당신의 맨발이 반짝거린다 간밤에 어딘가 걸어간 것 같은데 바람이 부는 방향으로 돌았다고 한다 맨발로 춤을 췄다고 한다 발롱!* 더 높게 발롱! 한 번의 착지를 위해 수많은 추락을! 당신이 자꾸만 가여워지고 있다 최현우 / 발레리나 * 발레의 점프 동작. (최현우, 사람은 왜 만질 수 없는 날씨를 살게 되나요, 문학동네, 2020) https://..
2020.03.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