번식(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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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주 / 폭설, 민박, 편지 1 ― 「죽음의 섬Die Toteninsel」, 목판에 유채, 80×150cm, 1886
김경주 / 폭설, 민박, 편지 1 ― 「죽음의 섬Die Toteninsel」, 목판에 유채, 80×150cm, 1886 주전자 속엔 파도 소리들이 끓고 있었다 바다에 오래 소식 띄우지 못한 귀먹은 배들이 먼 곳의 물소리를 만지고 있었다 심해 속을 건너 오는 물고기 떼의 눈들이 꽁꽁 얼고 있구나 생각했다 등대의 먼 불빛들이 방 안에 엎질러지곤 했다 나는 그럴 때마다 푸른 멀미를 종이 위에 내려놓았다 목단 이불을 다리에 말고 편지(片紙)의 잠을 깨워나가기 시작했다 위독한 사생활들이 편지지의 옆구리에서 폭설이 되었다 쓰다 만 편지들이 불행해져갔다 빈 술병들처럼 차례로 그리운 것들이 쓰려지면 혼자서 폐선을 끽끽 흔들다가 돌아왔다 외로웠으므로 편지 몇 통 더 태웠다 바다는 화덕처럼 눈발에 다시 끓기 시..
2020.10.15 -
이혜미 / 카오스모스
이혜미 / 카오스모스 건기의 끝자락에서 목마른 손톱이 서걱거렸다 열두 개의 주관적인 매듭으로 아침을 엮고 동그란 표정의 소년들은 찬송가를 부르며 서정적으로 월경일만을 기다렸다 그늘이 한 뼘씩 위태롭게 쌓여갔고 암순응보다 어려운 것은 완벽한 손나팔을 만들어 저 멀리 날개를 터는 새들을 부르는 일 나무딸기가 침묵하는 대신 민소매 소녀들의 입속이 더 붉어졌다 가여운 소년들 동산을 잃어버린 소녀들은 구름을 찢어 신고 걸음을 아껴 걸었으나 서로가 쓴 손가락 권총을 맞고 줄지어 쓰러져갔다 번식에 대한 묘사는 모두 봉인되었다 바람개비만이 남아 폭풍을 다급히 의역하는 시간 무너진 동산에서 도돌이표들이 일제히 창궐하기 시작했다 이혜미 / 카오스모스 (이혜미, 보라의 바깥, 창비, 2011) ht..
2020.07.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