벌레(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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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건영 「계절」
사거리에 서 있다가 사람이 사람을 실수로 죽이는 것을 보았다 피가 흘렀지만 구름과 바람이 같이 흘러 화창해졌다 신호등은 정해진 색깔로 점멸하고 있었다 눈물을 삼키다 가라앉는 사람도 보았다 은하수는 하늘에 떠 있다 밤하늘에도 물이 가득하다 이름을 부를 때면 입에 간격이 생긴다 선분 같은 걸 공책에 그리고 있다 아무도 부르지 않는 네 번째 이름을 스스로 지어 보면서 그 물을 다 보고서도 우리는 물을 마시고 살고 있지 않습니까라고 말하면서 넷이 모여 하나가 된다니 이상합니다 집이라는 것이 생길 것 같다 공포에 질린 바둑알처럼 사람들은 희거나 검은 얼굴을 하고 있다 안전하다고 합니다 넘치는 것이 있습니까 안전하다고 말하면서 우리는 문을 걸어 잠근다 계절의 담장을 주인 없는 고양이가 걸어서 통과한다 어..
2021.03.15 -
허은실 / Midnight in Seoul
허은실 / Midnight in Seoul 도시의 틈새에서 어둠이 새어나온다 홍등이 걸린다 모텔 네온사인이 켜지고 묘지에 돋는 붉은 십자가들 라디오에선 이퓨렛미인 유네버로스트미 내부순환로 양방향정체 방음벽 너머로 골리앗 크레인 도시를 굽어본다 피가 튄 곳마다 거인들이 태어난다고 하지 저 환한 통증들 좀 봐 오그라드는 몸 위로 술잔이 건너가고 구운 살의 냄새 가득한 성수 방면 마지막 전철 가방을 끌어안고 입을 벌린 채 기울어진 사내가 깨달음처럼 튀어나간다 가방을 끌어안고 두리번거리는 등뒤로 스크린 도어가 매끄럽게 닫힌다 철새들은 한쪽 눈을 뜨고 잔대 감지 않는 거겠지 기린처럼 아름다운 동물이 서서 자야 하다니 이상해 벌레들이 자꾸 집에 들어와서 죽어 오늘도 내 팔을 내가 베..
2020.07.12 -
조연호 / 배교
조연호 / 배교 색약인 너는 여름의 초록을 불탄 자리로 바라본다 만약 불타는 숲 앞이었다면 여름이 흔들리고 있다고 말했겠지 소년병은 투구를 안고 있었고 그건 두개골만큼이나 소중하고 저편이 이편처럼 푸르게 보일까봐 눈을 감는다 나는 벌레 먹은 잎의 가장 황홀한 부분이다 조연호 / 배교 (조연호, 천문, 창비, 2010) https://www.instagram.com/donkgrine/
2020.06.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