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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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승유 / 사실
임승유 / 사실 여기 영혼이 있어. 불쑥 그런 말을 해버렸다. 숙소를 떠난 지는 한참 되었다. 왜 그런 말을 하냐며 너는 울먹이고 여길 봐. 이렇게 빛나는 이게 영혼이 아니면 뭐겠니. 머릿속이 하얘지는데 이건 아니라며 너는 돌아가자고 한다. 마지막으로 누가 불을 끄고 나왔는지 기억이 안 난다. 노력해도 안 되는 일이 있다. 앞으로 이런 일은 일어나지 않을 거야. 일어난 일을 따라 걷기로 한다. 멀리 불빛이 보이는 장면은 옛날이야기에 종종 나온다 한번 가면 못 나오는 거다. 알고 있었다. 임승유 / 사실 (임승유, 나는 겨울로 왔고 너는 여름에 있었다, 문학과지성사, 2020) https://www.instagram.com/donkgrine/
2020.12.29 -
임솔아 / 아홉 살
임솔아 / 아홉 살 도시를 만드는 게임을 하고는 했다. 나무를 심고 호수를 만들고 빌딩을 세우고 도로를 확장했다. 나의 시민들은 성실했다. 지루해지면 아이 하나를 집어 호수에 빠뜨렸다. 살려주세요 외치는 아이가 얼마나 버티는지 구경했다. 살아 나온 아이를 간혹은 살려두었고 다시 집어 간혹은 물에 빠뜨렸다. 아이를 아무리 죽여도 도시는 조용했다. 나는 빌딩에 불을 놓았다. 허리케인을 만들고 전염병을 퍼뜨리고 UFO를 소환해서 정갈한 도로들을 쑥대밭으로 만들었다. 선량한 시민들은 머리에 불이 붙은 채 비명을 지르며 뛰어다녔다. 내 도시 바깥으로 도망쳤다. 나는 도시를 벽으로 둘러쌌다. 그러나 모든 것을 태우지는 않았다. 나의 시민들이 다시 도시를 세울 수 있을 정도로만 나..
2020.09.20 -
조연호 / 배교
조연호 / 배교 색약인 너는 여름의 초록을 불탄 자리로 바라본다 만약 불타는 숲 앞이었다면 여름이 흔들리고 있다고 말했겠지 소년병은 투구를 안고 있었고 그건 두개골만큼이나 소중하고 저편이 이편처럼 푸르게 보일까봐 눈을 감는다 나는 벌레 먹은 잎의 가장 황홀한 부분이다 조연호 / 배교 (조연호, 천문, 창비, 2010) https://www.instagram.com/donkgrine/
2020.06.11